※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 남자가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영국 런던에 도착한 그는 짐에서 상파뉴산 (스틸)와인을 꺼내 잔에 따랐다. 와인에서 기포가 일었다. “맙소사, 낭패로군.” 황망한 가운데 그는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오! 와인 맛이 이렇게 시적일 수가!”
그는 프랑스 문학가 생테브르몽 후작이다. 그와 그의 영국인 친구들이 처음으로 샴페인의 진가를 알아차렸다고 한다.
금세 소문을 탄 샴페인은 인기가 치솟았다. 주요 샴페인 생산지인 랭스에서는 9세기부터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기에 이곳 와인 상인들은 왕실과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샴페인을 우선 왕실과 귀족, 유명 인사에게 소개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어 상류층을 닮고 싶어하는 돈 많은 부르주아지가 통 큰 고객이 되었다. 샴페인은 결혼식이나 진수식 등 축하 자리에도 등장했다. 샴페인의 거품은 곧 기품이었고, 성공과 부유함의 상징이 됐다. 한편으로는 갑자기 부자가 된 부르주아지 졸부를 비꼬는 뜻도 담겼다.
1729년 뤼이나를 시작으로 모엣&샹동, 뵈브클리코 같은 샴페인하우스가 속속 문을 열었다. 신흥 부르주아지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계몽주의가 퍼지고 백과사전이 편찬되는 등 세상은 나날이 변해 갔지만, 여성에게는 봉건시대의 연속일 뿐이었다. 상공업에 진출할 기회도 적었고, 상거래용 은행계좌도 열 수 없었다.
허나, 당시에도 시대의 한계를 넘어 샴페인의 스타일을 정립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두 여성이 있었다.
먼저, 뵈브클리코의 경영자인 바브 니콜 퐁사르당. 그녀는 27세에 남편이 죽자 샴페인하우스를 맡아 이끌었다. 마침 투명한 와인잔이 유행하자, 그녀는 샴페인 빛깔이 중요하다는 점을 직감했다. 그런데 효모 잔해물이 골치였다.
와인을 병에 넣고 효모와 당분을 첨가(Liqueur de tirage)하면 병 속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나 기포와 가스가 생긴다. 숙성하는 동안 발효를 마친 효모 잔해물은 바닥에 가라앉아 자가분해를 일으키며 와인의 풍미를 더하고 기포를 더욱 섬세하게 만든다. 다만, 와인 빛깔을 뿌옇게 만드는 게 문제였다.
스틸와인의 경우, 달걀흰자(레드와인)나 부레풀(화이트와인) 등에 엉키게 해 가라앉힌 부유물을 따라내면 와인이 맑아졌다. 그런데 샴페인은 이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샴페인의 생명인 탄산과 기포를 잃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침내 구멍이 뚫린 두 개의 나무판을 A자 모양으로 붙인 ‘퓌피트르’라는 기구를 셀러마스터인 앙투안느 드 뮐러에게 만들도록 했다. 병을 구멍에 꽂아 6주 동안 매일 조금씩 돌리면, 병 입구에 효모 찌꺼기가 모인다(르뮈아주). 이윽고 마개를 열면 압력 덕분에 찌꺼기가 병 밖으로 튀어나온다(데고르주망). 그 순간 손가락으로 재빨리 병 입구를 막아 마개를 닫는다. 이 방법으로 그녀는 드디어 맑은 샴페인을 만들어 냈다.
그 뒤에도 작황이 좋은 해에만 만드는 빈티지 샴페인을 1810년 최초로 출시했고(샴페인은 논빈티지가 대부분이다), 블렌딩 로제 샴페인도 최초로 선보였다. 뵈브 클리코는 자사 프레스티지퀴베 샴페인에 ‘위대한 여성’이라는 뜻의 ‘라 그랑드 담’이란 이름을 붙여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효모 잔해물을 빼내고 나면 그 양만큼 와인을 보충해야 한다. 보통 전에 만든, 즉 리저브 와인에 당분을 넣어 보충(Liqueur de dosage)하는데, 당분 비율에 따라 와인의 단맛 또한 달라진다. 당시에는 당분을 리터당 100~300g을 첨가했다고 하니, 샴페인이 얼마나 달았을까.
바로 이때 다른 여성이 등장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달달한 샴페인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이전에도 단맛을 줄인 샴페인이 있었다. 그녀는 페리에주에가 영국 대리인의 요구로 덜 단 샴페인을 만들었지만 인기가 없었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감하게 당분을 ‘대폭’ 줄인 오늘날의 ‘브뤼’ 스타일 샴페인을 출시했다. 이 샴페인은 주요 고객인 영국에서 크게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세가 된다.
이 여성의 이름은 루이스 포므리이다. 포므리 역시 남편이 죽자 샴페인하우스를 더 혁신적으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포므리 샴페인하우스는 자사 프레스티지퀴베 샴페인에 그녀의 이름 ‘루이스 포므리’를 붙여 자부심을 표했다.
퐁사르당과 포므리, 이들 이름 앞에는 ‘뵈브’라는 말이 붙어 있다. ‘남편을 잃은 부인’이라는 뜻인데, 두 여성이 워낙 유명한 나머지 상파뉴 지방에서는 뵈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름에 뵈브를 붙인 샴페인하우스가 많이 생겨났다. 게다가 뵈브에게는 은행계좌도 터 주었다고 한다.
샴페인의 탄생이 그러했듯, 한계점을 넘은 압력은 아무리 단단한 병이라도 깨뜨리는 법이다. 시대의 억압을 뚫고 우리에게 맑고 드라이한 샴페인을 남긴 그들에게 축배를!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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