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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유람] 감염병 방치로 뒤바뀐 교역 흐름… 무역중심지 운명 갈랐다

입력
2020.03.21 04:33
수정
2020.03.21 09:1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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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亞이어주며 14세기까지 국제무역 중심지

페스트 창궐에 안이한 태도로 산업 붕괴하며 쇠락

반면 伊는 적극적 검역으로 교역 중심지 위상 지켜

코로나19 계기 글로벌 공급망 새판 짜여질 수도

<1> 페스트로 쇠락의 길, 14세기 이집트

※ 오늘날 세계경제는 우리 몸의 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구촌 각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인물 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인문학과 경영, 디자인, 사회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의 눈으로 세계 곳곳을 살펴보려는 이유입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번씩 토요일 연재합니다.

최근 세계 각 나라들의 화두는 단연코 ‘코로나19’다. 중국을 넘어 유럽과 미국, 중남미 등 세계 각지로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주식시장은 물론이고 유가 등 실물 부분까지 여파가 이어지고, 전례 없는 경제위기가 닥칠 것이란 우려까지 나온다. 특히 매일 상황이 급변하고 있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태가 종식될지 누구도 예견하기 힘들다는 점이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다만 과거 역사에서 살펴보면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전염병이 장기화되면 개인이나 회사뿐 아니라 특정 국가의 운명까지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집트’다.

◇국제무역의 중심지, 이집트

원래 이집트는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기원전 27세기부터 번성이 시작돼 전염병으로 쇠락하기 시작한 14세기까지, 등락은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융성한 국가 중 하나였다.

이집트가 일찍부터 번영할 수 있었던 건 나일강이 만들어낸 광대하고 비옥한 곡창지대 덕분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언급한 기록도 있다. 이집트 땅의 비옥함은 북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얘기다.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 학문과 문화 예술을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이 됐다. 970년 설립된 알아즈하르대학(Al-Azhar University)의 사례를 보자. 오늘날에도 이슬람 학문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 일류 대학으로 꼽히는 아즈하르 대학은 파티마 왕조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배우고 싶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라’는 신조로도 유명하다. 설립 당시부터 입학과 출석이 자유롭고,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계속 다닐 수 있도록 충분한 재정 지원이 이뤄졌다.

유럽의 대표적인 최고(最古) 대학인 옥스퍼드대학(1294년)과 케임브리지대학(1284년)의 설립연도와 비교해 봐도 당시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의 학문적ㆍ문화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과장을 좀 보태면 적어도 10세기에는 이집트에 비해 유럽의 문화는 야만적인 수준이었다.

당시 이집트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국제적 교역의 중심축을 담당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것이다. 중국과 인도, 유럽을 이어주는 교역 루트는 크게 초원길과 바닷길로 구분된다. 그 중 바닷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아라비아 반도 북쪽 경로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페르시아만을 통해 쿠웨이트에 상륙해 바그다드로 가는 경로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라비아 반도 남쪽 경로로 지금의 예멘에서 홍해 북쪽으로 올라가 이집트 수에즈에 상륙하는 경로이다. 당시 이 두 가지 경로 중 아라비아 북쪽 경로는 상인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교역을 수행하기에는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과 아시아의 상인들은 이집트를 거쳐 교역을 수행했다. 동방의 교역품은 알렉산드리아 항을 거쳐 유럽 각지로 전파된 것이다.

물론 당시 국가들이 이집트를 새로운 항로로 찾은 데에는 중동과 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오스만제국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굳이 아프리카 최남단까지 내려가지 않고도 오스만 제국을 피해 교역할 수 있는 대안, 그것이 바로 이집트였던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아즈하르대학. 970년경 파티마 왕조 때 세워진 대학으로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이다. ⓒ위키피디아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아즈하르대학. 970년경 파티마 왕조 때 세워진 대학으로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이다. ⓒ위키피디아

◇페스트 막지 못해 쇠락의 길

이처럼 강성했던 이집트가 역사적인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 것은 14세기 들어서다. 결정적인 변수는 1347년부터 전세계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한 급성 전염병인 페스트(흑사병)였다.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의 카이로도 페스트의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당시 카이로 인구 50만명 중 3분의 1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그로 인해 2년 뒤인 1349년에는 카이로 인구가 20만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이집트의 국력을 빠르게 쇠퇴시켰다. 내부적으로는 북쪽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직물 산업이 붕괴되었다. 농업 역시 급격히 위축되었다. 대부분의 나일강 주변 경작지는 노동력을 기반으로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가파른 인구 감소가 농업을 붕괴시키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기초 산업이 붕괴되자 카이로 등 이집트의 대표 도시에도 기근이 닥쳐왔고, 결국 유럽 여러 왕조들과 상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줄 보다 안정적인 교역로를 찾게 됐다.

이 과정에서 부상한 나라는 포르투갈이다. 이집트를 통한 경로가 전염병이라는 위험요인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좀 더 원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역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됐고, 포르투갈이 새로운 해양 항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급기야 이집트는 동방과 유럽을 잇는 교역의 중심 역할을 되찾기 위해 포르투갈과 인도양, 홍해, 지중해를 잇는 해로의 주도권을 두고 전쟁을 벌인다. 1509년 디우해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인도양은 포르투갈 주도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디우해전 이후 불과 8년이 지난 후인 1517년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18세기 후반에는 다시 나폴레옹 프랑스군의 침략,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가 이어진다. 1952년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까지 수세기 동안 이민족의 지배시대가 계속된 것이다.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하기 시작해 2,000만명 이상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위키피디아.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하기 시작해 2,000만명 이상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위키피디아.

◇세계경제 공급망, 새판 짜질 수도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당시 이집트가 전염병(페스트)에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집트의 운명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사례와 견줘 보면 추론이 가능하다. 이집트가 동방과 유럽의 교역로의 중심 역할을 하며 가장 번성했던 시절, 유럽에서 교역의 파트너로 함께 번성했던 곳이 베네치아였다. 당시 페스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과 이집트는 전염병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이탈리아는 육로와 해로에 검역소를 설치하고 상인들은 위생청의 검사를 받도록 하여 이탈리아 내부로 전염병이 유포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이에 반해 이집트 지도층은 전염병을 관리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역소를 상거래를 저해하는 장애물로 치부하는 우를 범했다. 여기에는 이집트만의 특수한 상황이 배경에 있었다. 검역소를 거쳐가는 금속 노동자 길드와 요리 종사자 길드, 직물 노동자 길드 등은 이집트 경제의 ‘돈줄’이었다. 이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세금이 경제의 주요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에 가장 큰 수입을 안겨주는 상인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자들’이라는 오명을 씌우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상이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극명한 차이를 불러왔다. 1450년경부터 이탈리아의 사망률과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의 사망률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집트는 1800년대 초반까지 계속해서 전염병이 번졌지만,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지역은 15세기 중반 이후에는 특정 지역에만 한정적으로 발병하거나 점차 간헐적인 형태로 발병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탈리아는 다시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이집트에게는 이후에도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 세계 각국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코로나19를 조속히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국가는 확산세를 빠르게 잠재우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회복하고 있고, 또 다른 국가는 코로나19로 인한 피해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글로벌 벨류체인(가치사슬) 내지 공급체인(Supply Chain)의 판이 새로 짜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거래처로부터 부품, 소재 등을 조달 받기 어려워진 기업들은 어느 순간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부품과 소재에 맞추어 제품 생산라인을 변경할 것이고, 한번 변경된 생산라인은 좀처럼 뒤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교역의 흐름과 경로마저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을 수 있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코로나19의 빠른 종식이 무엇보다 필요한 이유, 그리고 이번 사태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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