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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의 감독, 눌러 붙지 않은 프라이팬의 공포를 고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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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의 감독, 눌러 붙지 않은 프라이팬의 공포를 고발하다

입력
2020.03.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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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크 워터스'는 한 변호사가 거대 화학기업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수C&E 제공
영화 '다크 워터스'는 한 변호사가 거대 화학기업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수C&E 제공

내세울 만한 배경 하나 없는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은 오직 성실함 하나로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자리까지 오른다. 탄탄대로 앞에 선 롭은 할머니를 안다는 한 목축업자의 방문으로 예기치 못한 인생 길로 들어서게 된다. 대형 화학기업이 목장 주변에 독성 폐기물을 묻어 소190마리가 떼죽음을 맞았다는 목축업자의 주장을 귓등으로 들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장을 찾는다. 롭은 소들을 묻은 봉분들과, 미쳐 날뛰는 소를 보고서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롭은 이후 로펌의 잠재적인 고객인 화학기업을 대상으로 인생을 건 법정싸움을 펼친다.

영화 ‘다크 워터스’(상영 중)는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사회 고발 영화다. 정의감과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한 의인이 거대 기업을 대상으로 힘겹게 싸우며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크 워터스’는 뻔한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니다. 현재진행형 사건을 다루며 전형성의 함정을 피해간다. 독성 폐기물 PFOA이 눌러 붙지 않는 프라이팬 등에 널리 쓰였고, 거대 화학기업이 듀폰이라면. 영화 속 공포는 현실 자체가 된다. 관객은 롭의 감정에 이입하게 된다. 롭이 분노할 때 함께 분노하게 됐고, 그가 큰 장애물을 만났을 때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소송에서 승기를 잡게 됐을 때의 쾌감도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다크 워터스’는 그렇게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롭의 험난한 투쟁으로 관객을 이끈다.

영화는 롭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주변인들의 조력을 놓치지 않는다. 롭의 아내 사라(앤 헤서웨이)는 롭이 외로운 싸움을 할 때 가계가 기울자 불만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롭이 최대 위기에 몰렸을 때는 힘을 아끼지 않는다. 여러 제보자들, PFOA와 발병 사이의 유관관계를 찾을 수 있도록 유전자 검사에 나서는 수만명의 사람들도 숨은 조력자다.

롭의 가장 큰 후원자는 로펌 대표 톰(팀 로빈슨)이다. 톰은 “경영을 책임지는 자”로서 롭이 돈은커녕 회사에 손실을 입힐 가능성이 큰 소송에 매달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역회의에서 롭이 소송을 계속할 것인지를 두고 논의할 때 부정적인 의견이 형성되자 톰은 이렇게 일갈한다. “이 친구가 수집한 증거를 제대로 보기나 했어? 다들 좀 읽어! 듀폰의 미필적 고의와 부패 혐의를 파악하고 난 뒤에나 우리가 그걸 방관해야 할지 말지를 얘기해! 이래서 미국인들이 변호사를 싫어하는 거야. 이런 게 다 전 세계 시민운동의 불씨가 되는 거고. 우리는 듀폰을 잡고 싶어 해야 해! 미국 기업이란 게 이거보단 나아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은 기업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하고!” 비중이 크지 않은 톰 역할을 유명 배우 팀 로빈슨에게 맡긴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영화는 괴짜기질 강한 의인 하나만으로 사회 부조리가 바로 잡히지 않는다고 말하려 한다. 여러 사람이 연대해 끈질기게 싸워야만 정의실현이 조금이나마 가능하다고 시사한다.

영화 '다크 워터스'에서 롭이 서류더미에 파묻혀 단서를 찾고 있다. 거대 화학회사 듀폰은 롭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수십년치 서류를 보내지만 롭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야 만다. 이수C&E 제공
영화 '다크 워터스'에서 롭이 서류더미에 파묻혀 단서를 찾고 있다. 거대 화학회사 듀폰은 롭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수십년치 서류를 보내지만 롭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야 만다. 이수C&E 제공

감독은 토드 헤인즈다. 두 여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캐롤’(2015)로 국내 예술영화 팬을 울린 이다. ‘벨벳 골드 마인’(1998)과 ‘파 프롬 헤븐’(2002), ‘아엠 낫 데어’(2007), ‘원더 스트럭’(2017) 등 그의 연출 이력을 돌아보면 ‘다크 워터스’는 낯설어 보인다. ‘다크 워터스’는 화려한 색감이나 아름다운 선율로 관객의 눈과 귀를 자극하며 등장인물의 감정을 전달했던, 헤인즈의 장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주로 겨울을 배경으로 삭막한 화면을 만들어내며, 음악 대부분은 음산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헤인즈는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화법을 종종 따랐다. ‘벨벳 골든 마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글램록 스타를 추적하는 한 언론인의 이야기를 그렸고, ‘파 프롬 헤븐’은 남편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알게 된 한 여인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했다. ‘아엠 낫 데어’는 7명의 각기 다른 자아를 등장시켜 전설적인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의 실체에 접근하려 했다. ‘원더스트럭’은 두 시대를 병치시켜 호기심을 유발하며 손녀와 외조모의 재회를 따스하게 담았다. 헤인즈의 전작처럼 ‘다크 워터스’에서도 사람의 온기는 여전히 높다.

헤인즈는 러팔로의 제안으로 메가폰을 잡게 됐다.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러팔로는 롭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선 영화화에 나섰고, 헤인즈를 감독으로 점찍었다. 헤인즈는 보도자료를 통해 러팔로의 제안을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12세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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