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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 이름 되찾은 수원 ‘만석거’ ‘축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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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 이름 되찾은 수원 ‘만석거’ ‘축만제’

입력
2020.03.16 12:57
수정
2020.03.16 18:0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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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만석거와 축만제가 60여년 만에 이름을 되찾는다. 현재의 만석거 전경 모습. 수원시 제공
조선시대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만석거와 축만제가 60여년 만에 이름을 되찾는다. 현재의 만석거 전경 모습. 수원시 제공

경기 수원시에 있는 인공저수지인 ‘일왕저수지’와 ‘서호’ 등 2곳의 명칭이 조선시대 정조 임금 당시 조성되면서 지어졌던 이름으로 환원된다. 이들 저수지는 정조 임금 당시 각각 ‘만석거’와 ‘축만제’로 불렸다.

수원시는 지난 11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제2020-1130호)에 따라 ‘일왕저수지’와 ‘서호’의 명칭이 원래 이름인 ‘만석거’와 ‘축만제’로 공식 변경됐다고 16일 밝혔다.

정조는 수원화성 축조 당시 가뭄이 들자 안정된 농업을 위한 관개시설로 1795년에 ‘만석거’(萬石渠·현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305)를, 1799년에는 ‘축만제’(祝萬堤·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를 조성하고 황무지를 개간,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했다.

‘만석거’는 ‘만석의 쌀을 생산하라’는 의미를,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 내용은 ‘화성성역의궤’에 전해지고 있다.

이후 만석거는 일왕저수지, 조기정 방죽 또는 북지로 불리기도 했으며, 1936년 수원군 일형면과 의왕면이 합쳐져 일왕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일왕저수지’로 불렸다.

조선시대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만석거와 축만제가 60여년 만에 이름을 되찾는다. 현재의 축만제 전경. 수원시 제공
조선시대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만석거와 축만제가 60여년 만에 이름을 되찾는다. 현재의 축만제 전경. 수원시 제공

축만제는 수원화성의 서쪽에 위치하면서 1831년(순조 31) 항미정 정자 건립 시, 소동파의 시구에서 항미정 명칭을 따오면서 일명 ‘서호’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던 중 1961년 국무원 고시 제16호에 의해 두 저수지의 법적 명칭이 각각 ‘일왕저수지’와 ‘서호’로 제정됐다. 이후 이들 이름은 60여년간 공식적인 이름으로 사용됐다.

이에 수원시는 지난해부터 두 저수지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명칭 정정을 추진, 원래의 지명 찾기에 나선 것이다. 명칭 변경은 수원시 지명위원회와 경기도 지명위원회의 심의·가결과 국가지명위원회 등 1년여의 과정을 거쳐 지난 11일 국토지리원 고시로 결실을 맺었다.

다만 국가지명위원회는 지명표준화의 제1원칙(1객체 1지명)에 따라 공문 등 법적 문서에서는 ‘축만제(서호)’와 같은 병기는 지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서호’라는 지명은 별칭으로 사용 가능하다고 밝혔다.

심규숙 시 문화예술과장은 “60년 만에 ‘만석거’와 ‘축만제’라는 이름을 되찾게 돼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이 담긴 수원시의 정체성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소중한 문화유산이 원래의 이름으로 후대에 불려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두 저수지는 관개 시설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과 2017년에는 ICID(국제관개배수위원회)의 ‘세계 관개 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는 만석공원과 서호공원으로 이용되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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