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 인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의 매번, 맨 먼저 언급되는 사건으로, 1962년 7월 8일 육군 모 사단사령부에서 벌어진 최영오(당시 25세) 일병의 선임병 총기 살해사건이다. 군 위문공연이 예정돼 있던 그날, 최 일병은 연병장에 모인 같은 내무반 정모 병장과 고모 상병을 M1 소총으로 살해했다.
두 선임병이 최 일병의 연애편지를 상습적으로 뜯어보며 희롱한 게 발단이었다. 항의해도 소용이 없자 최 일병은 “사신 검열을 막아 달라”고 중대장에게 호소했고, 그 일로 최 일병은 선임병들의 눈밖에 났다. 서울대 천문학과 4학년 재학 중 18개월 단기 학보병으로 입대해, 3년 의무복무를 해야 하는 일반 병사들의 부러움과 미움을 받아오던 터였다. 군 재판기록과 관련자 증언 보도 내용에 차이가 있지만, 구타를 포함한 가혹행위와 모욕이 가중됐을 것이다.
범행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제지 당한 최 일병은 ‘상관 살해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그 해 6월 사형을 선고 받았고, 이듬해 2월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했다. 5ㆍ16쿠데타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선 지 불과 1년여 뒤의 일이었다.
서울대 동문 등 각계의 탄원에도 불구, 63년 3월 18일 형이 집행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처형 직전 유언으로 그는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고 한 뒤 “내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진술은 기자의 ‘작문’이며 그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만 남겼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가 한 칼럼에 인용한 최 일병의 옥중 수기에는 “나는 저 인간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노리개를 갖고 그것을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근성을 삭제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훈련병으로 강등된 그의 시신은 화장됐고, 당일 오후 전보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홀어머니(당시 60세)는 그날 밤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피해자’인 두 선임병은 각각 일계급 추서돼 국군묘지에 묻혔다.
국방부 ‘군 사망사고 현황’에 따르면 군내 사망사고는 60년대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줄어, 2018년의 경우 86명이 군기 및 안전사고로 숨졌다. 자살자는 56명이었다. 국방부는, 국민 10만명 당 자살자(20.8명)에 비해 군 자살자(8명)는 오히려 적다는, 기가 막히는 통계를 첨부해두고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