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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피해자 흉내 내는 거야?” 엄마 말 한마디에 죽으려 했어요

입력
2020.03.16 04:30
수정
2020.03.16 08:3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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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저는 학창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어요. 중학교 때는 남자아이들에게 집단 폭행도 당했어요. 가해 학생들과 같은 학교, 같은 아파트, 같은 동네에 살면서 늘 우울하게 지냈어요.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한테는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비교적 화목한 집안이었지만, 엄마는 잘못이 있으면 밀대자루나 먼지떨이 등으로 저를 때렸습니다. 성인이 돼서는 때리지 않았고, 저 또한 알아서 행동하려 노력해 큰 갈등은 없었습니다. 커서는 엄마와 단둘이 여행도 다녔어요.

최근 엄마와 심하게 싸우다 용기를 내 체벌 얘기를 했습니다. 엄마는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너 지금 피해자 흉내 내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 뒤 자해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유서에다가 학교에서 당했던 일,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일도 적었던 터라, 이제 옛일 모두 부모님이 알게 됐습니다. 자살에 실패하고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가 제일 편안했습니다. 모두 저를 걱정해줬으니까요.

제 주변 사람들은 제 일에 대해 전혀 몰랐을 거예요. 가족 앞에서는 늘 즐겁게 웃고 떠들었으니까요. 학교도 잘 다녔고, 대학 때도 고학점을 받고 시민단체 일도, 정치활동도 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남이 제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책에서 읽은 자존감에 대해 줄줄 설명해주면서도, 정작 저 스스로에게는 적용하지 못한다는 괴리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옛 기억이 떠오르거나, 가해 학생 비슷한 얼굴을 만나기라도 하면 미친 듯 일만 하며 떨쳐버리려 발버둥쳤습니다. 연애할 때는 상대에게 지나치게 집착했고 그 때문에 헤어졌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다투거나 갈등하는 상황을 못 견뎌 합니다. 화를 낼 줄 모르겠고, 다투면 일단 먼저 사과부터 합니다. ‘자아가 는 사람’이란 평도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마음이 고장 난 사람 같습니다. 제가 앞으로 평범하게 잘 살 수 있을까요.

박은아(가명ㆍ22세ㆍ대학생)


은아씨.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 당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겁니다. 누군가는 ‘뭘 그런 일로 그렇게까지 해’라 할지 모르지만, 저는 당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괴로웠을 거라고 깊이 공감합니다.

어렸을 적 왕따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습니다. 부당하게 공격받았던 기억, 또 주변 어른들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에 대한 상처는 큽니다. 당신은 왜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 했을까요. 당신은 왜 당신을 보호해달라 요청하지 못 했을까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들을 겪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각과 감정을 나눕니다. 그걸 소통이라 합니다. 소통은 일상의 가벼운 말부터 다툼, 모욕, 용서, 위로, 감사, 사랑 등 다양합니다. 인간은 이 다양한 소통 중 어릴수록 중요한, 부모와의 소통을 원하지요. 지금 당신을 괴롭게 하는 이유를 한 가지로 단정할 순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부모와 소통의 어려움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부모로부터 조건없는 사랑을 원합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학창시절이나 다른 사람들과 겪었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중요합니다.

부모도 자녀를 키우는 내내 자녀에게 많은 자극을 줍니다. 사랑하고 돌보고 먹이고 말도 가르치고 설명도 하고 제한도 하고 금지도 하고 충고도 합니다. 때로는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고 협박도 합니다. ‘다시는 해주나 봐라’ ‘너 같은 아이는 처음 봤다’ ‘너 그럴 줄 알았다 널 믿은 내가 바보지’라는 말을 홧김에 하기도 하지요.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하지만, 자신이 아이에게 주는 자극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도 왕왕 있어요. ‘애가 아직 어린데 뭘 알겠어’라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자극을 주는 거지요. 물론, 아이들이 그런 자극을 논리적으로, 의식적으로 정리하진 못해요. 하지만 그런 자극은 아이들 기억 어딘가에 남아 평생 영향을 줍니다. 특히 반복적인 나쁜 자극은 반드시 아이 몸 어딘가에 남아 나중에 예기치 못한 반응으로 표출됩니다. 무심하게 주고 받는 자극이 어떤 것인지, 잘 생각해봐야 할 이유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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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씨. 은아씨가 자살이나 자해를 시도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그 마음을 짧은 지면에서 언급하기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것만 같은 당신에게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작은 별빛 같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씁니다. 당신의 삶에 괴로운 기억과 상처도 있었다면, 즐거운 기억과 행복한 추억도 있었을 거예요. 누구와도 의논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아이 같은 모습도 있고, 적극적이고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모습도 있지요.

은아씨 마음이 힘든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닐 거예요. 반드시 부모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모와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기에 감정적 소통을 원했는데 소통이 안되니 심지어는 상대방이 미워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결국은 감정적 반응을 하게 되지요. 심하게 화를 내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공격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어떤 부모는 성적을 잘 받거나, 착한 행동을 하거나, 즐거울 때는 기분을 맞춰주고 호응을 해주지만 힘들거나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혹시 당신 어머니도 당신의 부정적 감정을 잘 수긍해주기보다 ‘한번 잘 생각해봐, 네가 힘들 이유가 없잖아, 뭘 그런 걸로 힘들다고 하니’라며 논리적으로 판단해왔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감정이란 건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이치에 맞춰 설명하는 게 아니거든요.

부모가 이러했다면, 아이는 요구했다가 거절당하는 게 힘들어서 표현하지 못했을 거예요. 혹시 은아씨가 학창시절 괴롭힘을 당하면서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한 게 그 때문 아닐까요. 어머니가 당신을 잘못 키웠다는 게 아니라 어머니는 어머니가 무슨 자극을 주는 건지 몰랐을 수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체벌 얘길 꺼냈을 때, 어머니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리고 그게 당신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어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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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을 거예요. 미워하는 마음을 한번 표현했을 때 돌아온 어머니의 대답과 태도는 당신에게 더 치명적이었지요. 어머니 사랑을 받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 정도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피해자 흉내를 내는 거란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거예요. 함께 여행도 다니지만, 당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도 하는 건 어머니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사랑과 미움 사이를 오가는 거예요.

은아씨, 부모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겨요. 돌봄과 보호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면,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매달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무리한 요구도 거절하지 못해요. 가까운 사람과 헤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분리 불안도 느끼지요. 자존감이 낮아져 스스로를 폄하하고, 제 주장을 펼치질 못합니다.

당신도 그랬을 거예요. 겉으론 밝고 명랑하고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내키지 않은 일도 나서서 하는 경향이 있을 거예요. 당신 또한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고, 기대고 싶을 거예요. 혼자서는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내재돼 있을 수 있어요. ‘나 혼자 스스로 돌봐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있는 거지요. 돌봄을, 사랑을 받고 싶은데 거절당할까 봐 지나치게 순종적이기도 합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가장 편안했다는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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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아씨. 당신에겐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치료 과정에서 당신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불안감의 원인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건강하게 대면하고, 그로 인해 무력해질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약물치료도 받아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좋아지진 않겠지만, 당신 안의 상처를 마주대하고 알아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너무나 가치있고, 소중하니까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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