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길어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의 가짓수가 늘어간다. 그렇다면 내 환자들 일부에게라도 더 깊이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을까.” 내 고통으로 타인을 위로한다니, 곰곰이 헤아려 보면 참으로 잔인한 말이다. 기척도 없이 닥쳐온 숱한 죽음, 남겨진 이들의 절규는 매일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성질의 것일진대. 그렇게 매번 뒤돌아 눈물 흘리면서도 이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마주하겠노라 다짐하는 건, 결국 사랑 때문이다.
글 쓰는 의사 남궁인은 생의 최전선에서 다시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살려 내려는 사람, 온 힘을 다해 살고자 하는 사람, 그 둘의 손을 움켜쥔 간절한 기도들. 그가 응급실 안팎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사랑의 편린 60편에 ‘제법 안온한 날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법 안온한 날들
남궁인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328쪽ㆍ1만5,000원
그 안에는 평생 해로한 아내를 떠나 보낸 할아버지의 애틋한 고백이 있고, 의식을 잃고도 허리춤의 전대를 움켜쥔 홀어머니의 사투와 그 어머니가 행상으로 키운 어린 두 아들의 안타까운 눈망울이 있다. 그러나 함부로 불행을 말해서는 안 된다. 화마가 옮겨 붙을까 봐 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아이를 품에 안아 살린 아버지, 희미한 확률을 이겨내고 생으로 돌아온 환자, 병마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돌보며 일상을 회복한 가족 등 고통 끝엔 언제나 놀라운 사랑이 있다.
많은 이들이 아프고 힘겨운 요즈음이다. 남궁인이 죽음과 다투며 써 내려간 문장들이 작은 위로를 건넨다. “삶은 수많은 고통으로 인해 풍성해진다”는 그의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1쇄 인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의료취약계층을 위해 쓰인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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