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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없는 세상’보다 ‘좋은 울타리’를 떠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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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없는 세상’보다 ‘좋은 울타리’를 떠올려라

입력
2020.03.13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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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넘게 분쟁지역 누빈 기자 

 타자 배제하는 벽 비판하지만 

 완충 위한 ‘사이 공간’ 효용 지적 

뻔히 이어져 있는 미국과 멕시코를 굳이 분리하려는 국경 장벽의 일부. 바다출판사 제공
뻔히 이어져 있는 미국과 멕시코를 굳이 분리하려는 국경 장벽의 일부. 바다출판사 제공

수필집 ‘무서록’(1941)의 첫 글 ‘벽’에서 소설가 이태준(1904~?)은 “벽이 그립다”고 고백했다. 벽은 그에게 “낡은 그림 한 폭 걸어 놓”을 수 있는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면(面)을 선물하고, 그런 벽에 그는 생을 의지한다.

‘겹겹의 공간들’(2014) 서문에서 기자 최윤필은 “언젠가부터 우리는 장애나 극복의 상징으로 별 생각 없이 벽을 대상화해 왔”지만, “우리는 누구나 벽 안에서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벽에 기대 휴식한다”고 썼다.

‘장벽의 시대’의 저자는 30년 넘게 세계의 분쟁 지역을 누벼 온 저널리스트다. 그래서 장벽에 적대적이다. 책의 시작이 아예 “이스라엘과 서안지구를 가로막는 장벽은 세계에서 가장 소름 끼치고 적의에 찬 구조물 중 하나”일 정도다. 이 정도면 흔한 논의다. 이 책을 차별화는 건 벽에다 맹공을 퍼부으면서도 이태준ㆍ최윤필마냥 벽의 긍정적 기능 또한 놓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 세계 벽들이 만들어 놓은 살풍경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냉전과 함께 무너진 큰 벽(베를린 장벽)을 수많은 작은 벽들이 대체하고 있다. 이 벽은 타자의 배제가 목표다. ‘초연결의 시대’인데 웬걸, 저자는 지구를 조각조각 찢어놓는 배타의 사례들을 잔뜩 늘어놓는다.

요르단강 서안, 베들레헴 외곽의 검문소에서 장벽을 넘어가려 기다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남성들. 바다출판사 제공
요르단강 서안, 베들레헴 외곽의 검문소에서 장벽을 넘어가려 기다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남성들. 바다출판사 제공

그러나 일방적 규탄에만 머물지 않는다. 벽은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효용을 지닌다. “2017년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 인정해 해당 지역 전체에서 불만이 폭발했듯 현 상황은 취약하며 분쟁을 재점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장벽은 폭력을 관리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배타는 전략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한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은 이민자의 유입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그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는 인구 통계에 느끼는 광범위한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히스패닉 등의 성장으로 미국이 더는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되지 못할 거라 걱정하는 일부 유권자들의 지지를 트럼프가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 국경 보안군 병사가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담장이 끊어진 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바다출판사 제공
인도 국경 보안군 병사가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담장이 끊어진 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바다출판사 제공

그것이 노리는 바는 내부 결속이다. 결속이 필요하다는 건 내부가 분열돼 있다는 의미다. ‘거대 제국’인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제각기 계급 인종 민족 신앙 등으로 갈라져 있다. 외부 장벽으로 내부 균열을 봉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작동한다. 심리적 장벽이 물리적 장벽을 낳는다.

저자는 무리 짓기와 외부자 경계는 본능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벽 없는 세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몽상에 가깝다. 게다가 벽을 허무는 일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이동이 완전히 자유롭다면 버려진 나라가 생기고, 너무 뒤섞여 정체성이 흔들리면 행복이 되레 달아날지도 모른다. ‘열린 국경’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이유다.

저자가 보기에 장벽은 완충을 위한 ‘사이 공간’이다. 인간에겐 자기만의 공간이 긴요하다. 벽으로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적대가 엄존한다면 장벽을 통한 분리 또한 불가피하다. 완벽한 통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선 오히려 장벽의 존재가 다행일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타협이 모색돼야 한다. 저자는 강조한다.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든다.”


 장벽의 시대 

 팀 마샬 지음ㆍ이병철 옮김 

 바다출판사 발행ㆍ360쪽ㆍ1만6,500원 

책은 잘 쓰인 옴니버스 르포르타주다. 장(章)마다 묘사와 더불어 인용이 촘촘한데 질문으로 저자가 드러나기 일쑤다. “나는 그에게 장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장벽을 억압과 압제가 지닌 권력의 상징으로 본다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식으로 말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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