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공포와 혐오 부추기는 ‘정보전염병’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판’(Pan)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지금이야 지구 위에 인간과 짐승만 살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상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거주자가 있었다. 제우스나 헤라와 같은 신들도 있었고, 에로스처럼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도 있었으며, 켄타우르스나 미노타우르스와 같은 반인반수(半人半獸)도 그들과 섞여 살았다. ‘판’은 그 형상으로만 보면 영락없이 반인반수이나,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상체와 염소의 하체, 머리에 뿔이 달린 그를 목축과 음악의 신으로 여겨졌다.
◇‘목신의 오후’ 깨트리는 파니코스
드뷔시의 교향시 ‘목신(牧神)의 오후’에 나오는 파우나(Fauna)는 판의 로마식 이름이다. 이 곡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서 얻은 감흥을 음악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시에서 판은 낮잠을 자다가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요정들이 목욕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는 두 요정을 끌어안고 관능적 희열에 빠져든다. 순간 환상의 요정들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그의 무거운 육체는 “정오의 씩씩한 침묵” 앞에 쓰러진다. 그리고 목신은 “목마른 모래 위에서” 다시 잠에 빠져든다.
신화 속의 판은 평소엔 팬플루트를 불며 조용히 숲 속을 거니는 온순한 존재이나, 좋아하는 낮잠을 방해 받아 깨면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면 새와 짐승들이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떼를 지어 도망가곤 했는데, 그 모습을 그리스의 저자들은 ‘파니코스’(panikos)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판이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편에 서서 싸웠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그를 본 페르시아 병사들은 다들 겁에 질려 줄행랑을 쳤다. ‘파니코스’는 이렇게 현현한 신과 마주치는 공포를 가리키기도 했다.
이 ‘파니코스’에서 유래한 것이 ‘패닉’(panic)이라는 단어다. 케임브리지 사전에 따르면 패닉이란 “갑작스레 찾아와 이성적 사고나 행동을 방해하는 강한 공포감”이다. 패닉은 개인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집단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건강한 이도 일생에 몇 번은 패닉을 겪는다고 한다. 물론 그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면 병원에서 ‘공황장애’(panic disorder) 진단을 받게 된다. 한편, 이런 의학적 맥락의 밖에서 ‘패닉’이라는 말은 대개 갑자기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공포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도망 또는 싸움, 패닉의 심리학
패닉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공포에 사로잡힌 이는 극도의 흥분에 빠져 원시적 본능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마련이다. 그 본능에 따른 행동의 하나는 ‘도망’이다. 앞에서 얘기한 ‘파니코스’의 두 예화에서는 모두 ‘떼를 지어 도망간다’는 모티프가 등장한다. 전형적인 패닉의 행동이다. 다른 하나는 ‘싸움’. 일단 패닉에 빠지면 극도의 불안에 빠져 모든 것이 제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 대상에서 도망갈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격뿐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예로 들어 보자. 사람들은 바이러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마스크 사재기에 나섰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한 사람의 마스크 착용을 권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약국 앞에 긴 줄을 늘어섰다. 그 줄에는 심지어 확진자까지 끼어 있었다. 생존의 본능에 따른 행동일 터이나, 이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더욱 부추겨 외려 제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할 뿐이다. 공포는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호주와 일본에서는 마스크와 화장지를 사려던 이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패닉과 바이러스는 서로 닮았다. 패닉도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강하여 한 사람의 패닉이 순식간에 집단으로 번지기도 한다. 발달한 IT기술은 원자화한 한 개인의 패닉을 전국적, 전지구적 규모로 금방 확산시킨다. 사회적 패닉의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뉴스다. 전염병(epidemics)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정보전염병(infodemics)이라지 않는가. 문제는, 이 패닉이 이성의 성취를 뒤엎고 문명사회에 온갖 종류의 원시적 감정과 야만적 행동을 다시 불러들인다는 데에 있다.
◇공포의 희생양, 인종주의적 폭력
얼마 전 이탈리아 한 주유소에서는 중국인이 “너는 바이러스를 가졌으니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직원에게 병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호주에서는 중국유학생이 현지인에게 맞아 광대뼈가 함몰됐다. 런던에서는 싱가포르 유학생이 현지인 청년들에게 얼굴에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았다. 네덜란드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국인 여성이 두 남자에게 “중국인”이라는 말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 독일에서도 두 명의 중국여성이 길을 가다가 독일여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런 단발성 범죄보다 더 무서운 건 보통사람들이 습관처럼 행하는 일상의 폭력이다. 프랑스의 한 일간지는 기사에 “황색경보”(alerte jaune)라는 표제를 달았다. 아시아인들이 유럽에 화를 가져온다는 19세기 황화론(黃禍論ㆍpéril jaune)의 재판이다. 유럽의 여러 곳에서는 아시아인들이 바이러스로 여겨져 기피 당하고, 캐나다에서는 아시아계 아이들까지 급우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 뉴욕의 지하철에서는 한 흑인청년이 아시아계 청년을 바이러스 취급하며 스프레이를 뿌리는 일도 있었다.
이 모든 폭력의 바탕엔 ‘바이러스=중국인=아시아인’이라는 부당한 등식이 깔려 있다. 공포에 사로잡힌 마음이 바이러스의 역학을 이해할 리 없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원인’ 대신에 당장 눈에 띄는 ‘범인’을 색출하려 원시적 희생양 제의를 벌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감염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곧 범인을 제거하는 일. 그리하여 범인으로 지목된 인간집합을 배제하려다가, 그게 안 되면 그 집합의 원소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패닉에 빠지면 이렇게 아득한 고대의 원시적 행동양식으로 퇴행하게 된다.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권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바이러스를 막으려면 ‘중국인’이라는 집단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바이러스=중국인’이라는 이 원시적 편견을, 정치권에서는 ‘전문가’의 견해라며 덜컥 받아 안았다. 대중의 공포를 정치적 공격의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처참했다. 그 당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코로나의 범인으로 지목된 중국인과 조선족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시작됐다. 공당에서 인증해 준 이 인종적 차별과 혐오는 최근 ‘차이나 게이트’라는 음모론으로까지 진화했다.
중국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난징에서는 중국인 주민들이 아파트에 들어오려는 한국인들을 막아 섰고, 안후이성에서는 한국인이 사는 집의 대문을 각목으로 봉쇄하는 일도 있었다. 극소수의 중국인이 벌인 일이나, 이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자 중국인 혐오는 더욱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중국의 공안이 한국인이 사는 집에 딱지를 붙이는 등 차별을 일삼는다는 도시괴담도 떠돌았다. 대중의 공포에 편승하여 일부 언론에선 중국인 유학생 집단을 ‘바이러스’의 온상으로 지목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패닉은 국경만 가르는 게 아니다. 대구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셋집이나 셰어하우스에서 쫓겨나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인=바이러스’나 ‘대구시민=바이러스’나 바탕의 심리적 기제는 동일하다. 그 바탕에 깔린 대중의 공포 역시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 민주당의 한 청년위원은 “대구는 손절해도 된다”고 썼고, 부산의 한 민주당원은 이 사태를 보수당만 찍는 “지역민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소설가 공지영은 트위터에 대구 확진자 그래프와 함께 “투표를 잘 합시다.”라고 썼고, 김어준은 코로나 사태를 아예 ‘대구사태’라 명명했다.
패닉을 어떻게 멈춰야 할까. 해법은 있다. 아산ㆍ진천의 주민을 생각해 보자. 그들도 처음엔 우한 교민 막겠다고 바리케이트 치고 밤샘농성을 벌였다. 파니코스를 멈춘 것은 ‘연대의 정신’이었다. 그들은 도착한 우한 교민들을 위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우한형제님들, 생거진천에서 편히 쉬어 가십시오.” 마스크 대란의 와중에 마스크를 필요한 이에게 양보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마스크에 관한 정확한 사실이 알려진 덕이다. 그렇다, 오직 ‘올바른 정보’만이 파니코스를 막아준다. 그러므로 ‘두려워 하자. 하지만 정확히 두려워 하자.’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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