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야말로 임신 출산 육아 같은 이야기들을, 그야말로 한번에 가로지를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했어요.”
최근 서울 연남동 작업실에서 만난 수신지 작가의 간결하면서도 전략적인 대답이었다. 평범한 한 여성이 ‘며느리’라는 역할을 수행하다 어떻게 가부장제라는 현실에 휘말려 들어가는지 섬세하게 그려냈던 만화 ‘며느라기’의 그 수신지 작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연재됐던 ‘며느라기’에는 당시 젊은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쏟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2017년에는 SNS 연재 만화 최초로 ‘오늘의 우리만화상’까지 받았다.
호응이 컸던 만큼 연재가 끝난 뒤 아쉽다는 독자들이 줄이었다. ‘며느라기’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삶을 다루는데, 여성들이 보기에 ‘진짜’는 그 이후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휴직하고, 다시 복직하고, 워킹맘으로 분주하게 오가면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수시로 느끼며, 회사를 다닐까 말까 숱하게 고민하는 그 순간들이 남아 있어서다. 말하자면 ‘며느라기’는 대한민국 여성의 삶이라는 대하드라마에서 도입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독자들 사이에서는 수신지 작가가 다시 돌아온다면, 무엇을 들고 올 지가 관심사였다.
그때 수신지 작가가 들고 온 게 ‘곤(GONE)’이다. 여성의 낙태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IAT라는 검사 키트가 개발되고, 낙태죄가 도입된 1953년 이후 한 번이라도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은 무조건 감옥에 가게 된 가상의 대한민국이 배경이다.
낙태를 키워드로 삼을 때 임신, 육아, 출산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작가의 판단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금세 입증된다. 첫째 딸 노민형은 워킹맘으로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긴다. 둘째 딸 노민아는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겨 경력단절을 걱정한다. 셋째 아들 노민태는 스무 살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는 바람에 불법 낙태를 알아봐야 할 처지다. 그리고 이들의 엄마, 아들을 낳기 위해 셋째 딸을 낙태한 엄마가 있다.
IAT 양성 판정을 받은 엄마는 수십 년 전 낙태 문제로 감옥에 가게 되고, 그 때문에 자식들의 육아 문제 등에 차질이 생긴다. 낙태란, 남아선호 독박육아 경력단절 같은 오랜 젠더 이슈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낙태죄 처벌을 받게 된 친정엄마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당장 육아 공백이 생겨요. 국가에선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정작 돌봄 시스템은 취약한 상황인 거죠. 게다가 그 엄마는 과거 정부의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 아래 소위 ‘낙태 버스’가 마을을 순회하던 시절 보건소에서 낙태 시술을 받은 인물이고요. 아들을 낳기 위해서요.”
수신지 작가는 이 가정의 문제를 통해 ‘낙태’를 둘러싼 사회와 국가의 이중적 태도, 여성에게만 쏠린 돌봄 노동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제목 곤(GONE)이 암시하듯, 작가는 그렇게 모든 여성이 하나 둘씩 사라진다면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그려내 보일 예정이다.
책 날개엔 작가 이름만 있는 게 아니다. 감수자로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 천지선 여성인권 변호사 이름이 올라 있다. 낙태는 윤리적, 종교적, 의학적 논쟁이 지속되어온 문제다. 만화를 그리면서도 고민이 녹록지 않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에게 묻고 또 물어가며 그렸다. 작가는 “낙태죄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해 만화로 풀어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며 “재미와 정보의 균형도 맞추면서 제 주장이 앞서나가지 않게 주의했다”고 말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이 만화 연재를 시작한 건 지난해 5월. 공교롭게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게 한달 전인 4월 11일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낙태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본격화될 수 밖에 없는 시기에 맞춘 셈이다. 수신지 작가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계기로 새 법을 짜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게 됐다”며 “이를 위해서는 낙태죄에 대한 공론화가 계속 이뤄져야 하는데 여기에 ‘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부를 묶어낸 수신지 작가는 2부 연재를 준비 중이다. ‘곤’은 1ㆍ2부 두 권으로 끝낼 생각이다. “그래도 결말은 해피엔딩일 거예요.” 일종의 ‘열린 결말’이던 ‘며느라기’와는 다를 것이란 귀띔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