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텍사스산 원유 한때 배럴당 27.45달러
사우디, 가격 인하에 증산까지 ‘공격 카드’
OPEC 감산안 거부한 러시아 응징 차원
석유 관련 기업 도산 우려… 신용위기 관측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수요 감소가 예상되는 원유 시장이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힘겨루기까지 겹치며 대혼란에 빠졌다. 장중 한때 30% 이상 폭락해 배럴당 20달러선까지 주저앉았다. 석유 관련 기업들의 수익성 악화와 그에 따른 대규모 신용위기를 우려하는 관측마저 나온다. 9일 국제 원유거래시장에서 유가 기준가격으로 흔히 사용되는 서부텍사스산 원유(WTI)의 4월 선물 가격은 한때 전날(배럴당 41.28달러) 대비 30% 이상 떨어진 배럴당 27.45달러대에서 거래됐다. 북해산 브렌트유 5월 선물 가격도 배럴당 45.27달러에서 한때 31.30달러까지 추락했다.
국제 원유가격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수요가 줄어들 것이란 전망에 하락세를 보여왔다. 이런 가운데 사우디와 러시아의 ‘석유 전쟁’ 소식이 또 하나의 결정타를 날렸다.
앞선 6일 사우디가 주축을 이루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하루 생산량을 150만배럴 줄이는 감산안을 들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회원국과 ‘OPEC플러스’ 회담을 벌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새 감산안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석유 생산량 확대를 통해 서방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가 감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러자 사우디는 가격 인하와 증산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우디는 공식판매가격을 6달러 인하하고 생산량도 하루 200만배럴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의 이 같은 선택을 두고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수립한 탈석유 신성장 계획 ‘비전 2030’에 따른 재정 수요를 맞추기 위한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공급 상황을 감안하면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치킨 게임’에 나선 것이란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날 국제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보고서를 통해 국제 유가가 최악의 경우 배럴당 2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또 사우디의 증산 결정이 러시아를 협상장으로 다시 끌어와 양측이 감산에 합의하더라도 이미 가격이 기존보다는 낮은 수준에 형성될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은 유가 하락의 여파로 요동치고 있다. 8일 사우디 리야드 증시는 8.3% 하락했고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9일 중 거래가 일시 중지됐다.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선물지수도 아시아시장에서 셰일 석유기업에 대한 우려로 하한인 5%까지 떨어졌다. 국내에서도 정유업계는 제품 단가 하락이 예상됐고, 건설ㆍ조선업계는 수요 감소 예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더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그린다. 미국 CNBC방송은 “유가 급락이 외려 잇따른 기업체 도산으로 신용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으며, 소비자물가 하락으로 인한 비용절감은 코로나19 때문에 수요 증가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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