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김형곤(金亨坤, 1960.5.30~2006.3.11)은 동국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1977년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에 입상하며 방송에 데뷔했다. 그는 1980년대 KBS ‘유머 일번지’ 등의 인기 코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과 ‘탱자 가라사대’ ‘네로 25시’ 등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뒤틀린 곳들을, ‘가진 이’들을 통해 풍자했다. 회장에게 ‘선물’하려던 도자기를 실수로 깬 이사가 “테이블을 ‘탁’하고 치니 도자기가 ‘퍽’ 깨지더라”라고 말하는 ‘회장님’의 한 장면은 한국 예능 방송이 경험한 새로운 차원이었다.
알려진 바, 그는 영관급 전역 장교의 아들이었고, 대기업 임원의 동생이었고, 법조인의 형이었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연예인이 된 그는 자신이 꼬집어야 할 곳의 디테일에 강했고, 그의 쇼는 방송보다 제약이 덜한 쇼 무대에서 더욱 빛났다. ‘소득 2만달러 시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을 풍자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잘 하면 될 것 같기도 해요. 없는 사람들은 죄다 불에 타 죽거나, 깔려 죽고, 굶어 죽으니, 어쩌면 되지 않겠어요?” 그의 성적인 개그는 성차별적 내용이 적지 않았다. 약자를 조롱하거나 비하해서는 건강한 웃음이 안 나온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던 그의, 거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그는 트랜스젠더 클럽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에겐 삶 자체가 무대였다. 동료 개그맨들이 한 케이블 방송에 출연해 전한 바,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한 건설업체로부터 홍보비를 타낸 뒤 스포츠 회사에서 협찬 받은 티셔츠에 태극기와 두 회사 로고를 인쇄해 관객들에게 배포했다. 같은 옷을 무리 지어 입고 동료 개그맨들과 함께 스타디움에 자리 잡은 그는 격렬한 응원 제스처로 중계 화면을 사로잡곤 했다. 그렇게 그는 약속을 지켰다.
살이 많아 혼자선 신발끈을 매지 못할 정도였다는 그는 삼겹살 체인사업을 벌인 적이 있고, 2000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한 적이 있다. 1999년 ‘웃음의 날(7월 7일)’ 제정 운동을 벌였고, 전국 비만인협회를 설립했고, 전남 신안의 작은 무인도에서 의료진을 갖춘 본격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던 계획도 추진했다. 그리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무리하게 운동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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