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 조정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아버지 재산을 둘러싼 네 남매의 분쟁을 두고 1년차 새내기 배석판사 박차오름이 재판장(부장판사)에게 과감한 제안을 건넨다. 법정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는 부장판사가 새내기 배석판사의 제안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재판이 전개된다.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판사로 임용되는 신임법관과 부장판사의 경력 차이는 통상 15년 내외. 현실의 배석판사들도 정말 박차오름처럼 당차게 제안할 수 있을까? 또 현실의 법원은 드라마와 같은 ‘열린 조직’일까?
◇배석 한 명이 사건 수백 건 동시 담당
보통 재판은 가운데 앉은 재판장이 모든 걸 결정할 것 같지만, 실은 배석판사 의견이 기초가 된다. 배석이 증거를 가지고 자신의 결론을 설명하면, 부장은 그 증거들을 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의견이 다르면 각자 증거를 갖고 2차 합의에 나선다. 서울의 3년차 배석판사는 “기록을 가장 꼼꼼히 검토할 수 있는 사람은 배석이기 때문에 오히려 배석의 의중이 더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자기 의견을 얼마나 강하게 말할지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박차오름 판사는 현실 속에도 존재할 법한 인물이다.
판결에 배석의 의중이 많이 반영되는 것은 주심판사가 ‘사건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합의부에 사건이 배당되면 두 배석이 순서대로 사건을 맡는데, 이때 사건을 맡은 배석을 ‘주심’이라고 한다. 주심은 기록검토부터 판결문 작성까지 선고에 이르기 전 사건에 관한 모든 업무를 맡는다. 그래서 주심은 자신이 맡은 사건을 부장보다 더 잘 안다. 부장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두루 알아야 하는 반면, 주심은 담당사건 위주로 검토하면 된다.
부장과 합의에 들어가기 전 주심이 검토하는 기록은 적게는 수백 장, 많게는 수만 장에 달한다. 사건 기록은 물론 유사 판례, 변호인ㆍ검사들이 내세우는 판례, 교과서, 주석서(하나의 규정에 대한 해석을 모아놓은 책)도 참고한다. 민사 사건에서는 양 당사자의 주장을 꼼꼼히 살피고,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형사사건에서는 검찰과 피고인 측이 놓친 쟁점은 없는지, 증거는 있는데 쟁점에 포함되지 않은 경우는 없는지, 그 반대의 경우는 없는지도 따진다.
합의부는 3명의 판사로 구성되지만 사건별로 검토해야 할 기록이 많아 실제로는 부장과 주심 두 명이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 주심을 맡은 사건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배석의 일정이 빡빡하기 때문이다. 부장과 의견이 다를 때 비주심 판사의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반영비율은 10% 이내라고 한다.
◇잦은 야근 서러운데 휴가도 3자 합의
검토할 자료도 많고 담당 사건수도 만만찮은 데다 판결문까지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배석판사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야근을 한다. 지방 대도시 법원의 경우, 민사합의부 배석은 항상 약 200~225건, 형사합의부는 100건 정도의 사건을 갖고 있다. 서울의 법원은 타 지역에 비해 사건 수가 적은 대신, 쟁점이 복잡해 난이도가 높다.
배석의 고유업무라고 해도 판결문 작성은 항상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판사의 업무는 효율성보다는 정확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기록을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 판결문 작성 시간도 넉넉지 않다. 보통 결심과 선고 사이 2주 기간이 있는데 최소 한두 번은 부장의 검토를 받아 수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결문 길이까지 길어지는 추세다. 서울의 한 단독판사는 “사건이 복잡해지고 쟁점이 많아지면서 판결문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석에게 서러운 일이 있다면 재판 때문에 휴가 일정도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형사 사건은 피고인의 구속 기간에 제한이 있어서, 민사 사건은 변호사 등 사건 당사자들의 일정을 고려해서 휴정기에 세 사람이 같은 일정으로 휴가를 가는 게 일반적이다. 재판이 목요일인 경우 휴일 전후로 연차를 내서 금요일부터 화요일까지 5일 연휴를 만드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드물다.
◇배석생활 필요하지만 너무 길어지는 건 곤란
배석판사는 그래서 단독판사가 되는 날을 꿈꾼다. 사건을 혼자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지만 재판ㆍ선고, 휴가 일정을 자유의지로 유연하게 짤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단독판사가 되는 만 7년 배석이 되면 ‘절대반지를 낀다’는 법조 은어가 생긴 이유다.
단독판사를 꿈꾸는 건 재판장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주심도 판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재판장이 진행해 놓은 틀 안에서의 영향력 행사다. 지방법원 4년차 배석판사는 “권력이나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판결문을 쓰다가 미비한 부분이 발견되면 심리를 더 진행하는 등 내 방식대로 재판을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석 7년이면 단독 단다’는 불문율은 깨진 지 오래다. 법조경력 5년차의 경력법관을 뽑는 법조일원화와 법원장 임기를 마친 판사가 다시 일선에 돌아오는 평생법관제가 시행되면서 배석판사 자원인 신규임용 법관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엔 8, 9년차 배석도 있고, 단독을 했다가 다시 배석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배석 기간이 늘어나는 이 문제는 2018년 전국법관대표회의 임시회의 당시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배석판사들은 ‘배석 생활은 향후 판사 생활에 큰 자산임이 분명하지만 너무 길어지는 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지방법원 지원의 6년차 배석판사는 “부장님들이 재판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 직업에 연착륙할 수 있다는 기회로서의 가치는 있다”면서도 “부장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빨리 단독은 되고 싶다”고 했다.
윤주영 기자 ro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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