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큰 충격은 예닐곱 살 정도의 여자아이였다. 선착장에서 키 큰 소년이 커다란 뱀을 목에 두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저 가난한 나라의 구걸법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기껏 폭 50㎝ 정도의 청색 플라스틱 통에 올라탄 채, 막대기로 낑낑 황토물을 저으며 보트마다 접근해서는, 잔뜩 기어드는 목소리로 “원 달라, 원 달라”를 읊조리는 아이의 모습에는 관광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얼른 달아나고만 싶었다. 가이드는 필수코스라고 했지만 그 다음부터 난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런 참혹한 재난을 관광상품으로 내놓다니!
캄보디아 시엠립(Siem Reap) 톤레삽(Tonle Sap) 호수의 선상 마을. 캄보디아에 살던 베트남인들이 1970년대 말 킬링필드 폴 포트의 학살을 피해 달아났다가 조국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넓은 호수에 집을 띄워 놓고 정착(?)한 곳이란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사원도 있고 학교도 지었다.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사장님, 여기, 당구장. 저기, 공장.” 캄보디아인 사공이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배ㆍ건물의 기능을 알려주었으나, 난 나무상자, 드럼통 따위를 타고 다니며 “원 달라”를 구걸하는 아이들만 힐끔거려야 했다. 어느 배에선가 깡마른 노인이 낡은 해먹에 누운 채 무표정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사전 조사라도 했다면 나으련만, 환갑잔치 대신이라며 얼떨결에 끌려간 여행이라 이런 풍경과 맞닥뜨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뒤늦게 캄보디아의 역사를 뒤적거린다. ‘킬링필드’도 다시 보고, 동남아시아 전쟁사도 찾아본다. 도대체 어떤 역사가 그런 생지옥의 풍경을 만들었을까? 폴 포트 정권의 실상을 그린 영화,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2016)를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와중이었다. 졸리는 2000년 ‘툼레이더’ 촬영차 캄보디아에 갔다가 그곳의 참상에 충격을 받고 전쟁과 분쟁 지역의 난민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엔 난민 기구에 연락해, 탄자니아, 파키스탄 등을 방문하거나, 개인으로는 가장 큰 액수라는 100만달러를 유니세프 긴급구호에 기부하는 등, 그 후의 행보도 과거와 크게 달랐다. 지난해 연세대에 입학한 장남 매덕스도, 캄보디아 촬영 당시 만난 난민 아이였다고 들었다.
내가 그곳에서 본 것은 1960~70년대의 내 고향 동두천이었다. 고인이 된 아버지도 실향민이었다. 고향을 떠나 그곳에 터전을 마련했건만 미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그곳마저 빼앗기고 또다시 변두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미군이 머리에 DDT를 뿌려주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부대고기, 부대빵이 식탁을 지켜주던 시절은 내게도 있었다. “원 달라”를 구걸하던 어린 소녀처럼, 어린 나도 미군을 만날 때마다 “초콜릿 기브 미!”를 외치며 쫓아다니고, 탄피를 주워 팔아 학용품을 마련했다. 내 기억의 고향은 어린 소녀의 톤레삽에서 그만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리는 캄보디아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함께 여행을 다니고 같은 광경을 봤건만 가족들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오히려 나보고 웬 유난이냐며 타박을 한다. 하기야 내가 생각해도 부질없는 짓이다. 졸리처럼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난민촌에 뛰어들 의지도 능력도 없고, 이런 식의 호기심도 머지않아 색이 바래고 말 일이다. 기껏 구호재단에 소액기부를 하는 것으로 양심에서도 밀어낼 것이다. 그래, 몰라도 되는 일은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모르고 독재를 모르고……하지만 폴 포트를 만든 건 결국 우리의 무지와 욕망이다. 내 가족이, 내 나라가 다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빌어본다. 그런데 안젤리나 졸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내가 본 것을 그녀도 보았을까?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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