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한국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을 오랫동안 장식해왔던 일본 장르소설 작가들 이름이다. 재미와 필력으로 무장한 일본 장르 소설에 한국 독자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지난해 상반기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톱20 중 소설은 4편, 그 중 2편이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어가 잠든 집’이었다.
이게 지난해 하반기 일본의 수출규제, 한일관계 경색으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감히, 일본 장르소설을 낼 수 있을까. 출판사들은 주춤했다.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기 위해 등판했다.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세상의 봄’(전2권)이 나와서다.
시대물 추리 미스터리 SF 호러 등 장르를 불문하고 만능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온 미야베 미유키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작심하고 쓴 81번째 작품이다. 총 920쪽, 원고지 매수만 3,000매를 훌쩍 넘기는 방대한 분량에서부터 독자들을 압도하는, ‘미미 여사(미야베 미유키 애칭) 완전체’ 같은 소설이다.
세상의 봄(전2권)
미야베 미유키 지음ㆍ권영주 옮김
비채 발행ㆍ920쪽ㆍ3만원
소설 배경은 미야베 미유키의 전매 특허 중 하나인 ‘에도 시대’. 성군이 될 것으로 촉망 받던 청년 번주 시게오키가 정신착란으로 인해 시골 저택에 유폐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착란 상태에서 시게오키는 어린 남자아이, 중년 여성, 거친 사내를 오가고, 또 다른 자아가 나타나면 그 이전 다른 자아일 때의 상황은 기억하지 못한다. 시게오키를 충심으로 보필하던 주치의, 나이 든 가신, 호위 무사, 하녀 등 주변인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게오키의 정체성 상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쓴다.
이들의 첫 추론은 모종의 원한을 품은 ‘사령’이 시게오키의 몸에 빙의됐을 가능성. 영혼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무녀 일족이 우연히 시게오키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됐고, 입막음 때문에 몰살된 무녀 일족이 복수를 위해 시게오키 몸에 들러붙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게오키가 어린 아이일 적에 모습은 평민의 아이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시게오키의 착란이 시작될 무렵 소년 연쇄 실종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시게오키 저택 인근 호숫가에서 소년의 백골이 발견되며 이야기는 다시 급물살을 탄다. 무녀 일족의 몰살, 소년 연쇄 실종사건, 여기에 주민들이 대거 희생됐던 화재 사건까지, 과거 비극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파편처럼 나뉘어 있던 진실이 마침내 하나로 모여든다.
여기에 시게오키가 오랫동안 내면 깊숙한 곳에 봉인해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내 놓으면서 소설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수치와 상처로 얼룩진 과거 탓에 제대로 된 군주이자 성인으로 자라지 못했고, 결국 세 개의 자아로 분열되고 말았다고 시게오키는 고백한다.
정신 착란과 연쇄 살인이란 소재를 시대 소설에 자연스럽게 버무려내는 솜씨는 ‘과연 미미’라 탄복하게 만든다. 굳게 닫혀있던 시게오키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여인 다키와의 애틋한 연정은 딱딱해지기 쉬운 시대소설에 봄기운마저 불어넣는다.
단, 에도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역사적 설정과 낯선 표현들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다이묘와 막번 체제를 이해하고 책 뒤에 실린 인물 관계도를 참조해가며 읽어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 진입장벽을 넘어서고 나면 촘촘한 구성과 매력적인 등장인물에다 감동까지, 기묘하고도 아름답다던 미미 월드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숨쉴 틈도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야기 바다에 빠지고 싶은 독자라면 미미 여사의 초대에 응해볼 만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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