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하철을 타고 간다. 가족들이 쓸 마스크를 구하려 했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마스크 없는 당신의 얼굴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힌다. 애써 외면하며 스마트폰을 열어 속보를 확인한다. 모 환자가 어느 지역을 활보하고 다녔다는 기사다. 당신은 분노한다. 전파자들은 부주의하고, 몰상식하다.
당신은 댓글에 전파자를 구속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쓴다. 모든 것을 추적해서 공개하고 망신을 줘야 한다고 쓴다. 짧은 글이지만 정의가 실현됐다. 댓글 안에서 당신은 정의의 사도다. 며칠 후. 당신은 감기 기운을 느낀다. 공포를 달래기 위해 당신은 며칠 전 쓴 댓글을 다시 확인한다.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눌렸다. 위안이 된다. 정의는 살아있다.
당신이 쓴 댓글의 세계에는 먹사람이 산다. 먹사람이란 종이 위 먹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조너선 갓셜은 이 먹사람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해리엇 비처 스토가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먹사람은 노예제도를 폐지시켰다. 반유대주의자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의 먹사람은 히틀러라는 열여섯 살 소년을 감화시켜 그 소년이 책을 태우고, 사람을 태우고, 온 세상을 태우게 만들었다.
먹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머릿속에 어설픈 셜록 홈스가 살기 때문이다. 이 셜록 홈스는 애매한 단서에서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가짜여도 상관없다. 그 이야기가 아무 의미 없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만 한다면.
셜록은 우리가 코로나 관련 언론 기사를 볼 때도 출동한다. 그는 우선 ‘큰 걸음으로 힘차고 당당하게 걷다’를 뜻하는 ‘활보하다’라는 말에 주목할 것이다. 바이러스가 한국에만 오면 사람들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언론들은 감염자들이 ‘거침없이’ ‘활보하고’ 다녔다고 전한다.
탐정은 이 어휘에서 파렴치한 악당을 떠올릴 것이다. 활보는 자격이 없는 자가 허락되지 않은 공간을 침입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활보는 ‘범죄자’가 하거나, ‘속옷차림’으로 ‘당당하게’ 하는 게 아닌가? 따라서 ‘활보하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의도치 않게 전염병에 감염된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가해자가 된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전파자’라는 말도 가해자 만들기에 동원된다.
이쯤 되면 감염자들이 악당 아닌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뒤죽박죽인 상황이 극적이고 깔끔한 서사로 정리된다. 원인(파렴치한 전파자 악당)이 있고 결과(감염)가 있다. 그리고 악당을 뒤쫓는 추적극이 있다. 이 서사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혐오를 낳는다. 이제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 그 임무는 독자들이 혐오의 DNA로 만든 먹사람들에게 주어진다. 혐오의 먹사람들은 악당의 자리에 특정 국적, 지역, 집단을 채워 넣고 이들만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손쉽고 간편한 정의 구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먹사람들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가, 간토가, 4ㆍ3이 증명한다.
코비드19 사태가 말해 주는 진실은 명확하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연대와 협력, 지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바이러스만큼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망쳐버릴 ‘혐오’의 슈퍼 전파와 대량 감염이다.
다시 당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증세가 악화되어 당신은 급기야 확진 판정까지 받는다. 이제 당신은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감염이 아니라 사회적 고립과 낙인이며, 정말로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사회적 지지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언론은 당신을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파렴치한 가해자로 만들어 판매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먹사람과 그 자손들에게 당신을 던져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혐오가 당신을 찾아온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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