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말 ‘번영을 위한 평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비전’, 일명 중동 평화구상을 발표했다. ‘세기의 협상’이 될 것이라 공언하며 지난 3년을 공들여 준비한 구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는 ‘미국 우선주의’와 ‘신(新)고립주의’로, 전문가들도 그가 발표하고 이행하려는 중동 정책들을 해석해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측불가였다. 정책 간 모순도 자주 나타나 어떤 학자들은 고도로 계산된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부를 정도다.
미국 역대 대통령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스라엘 편향성’을 보였다. 미국 정치에서 유대인의 영향력, 유대인의 역사적 비극에 대한 애증, 중동 국제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지정ㆍ지경학적 지위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확고한’ 이스라엘 편향성을 보일 뿐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려 한 점에서 전직 대통령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중동 평화구상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오랜 분쟁의 핵심인 △국경 문제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트럼프 대통령은 ‘난민촌’으로 표현) 문제 △예루살렘 문제 등에서 적나라한 편향성을 드러낸다. 팔레스타인에 동예루살렘 변방 일부 지역을 수도로 하는 국가를 설립하도록 하면서도 예루살렘 전체는 이스라엘 수도라고 재확인한 게 단적인 예다. 결정적으로 예루살렘의 핵심이자 3대 종교 성지가 모인 올드시티(구시가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했다. 일각에서 이번 구상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보낸 ‘트로이의 목마’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은 70여년간 지속된 이ㆍ팔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제안이 있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한 만큼 “이제는 갈등을 끝낼 때”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법은 트럼프의 말을 빌리자면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현실적(realistic)’ 두 국가 해법이다. 그러나 이는 국제사회의 ‘두 국가 해법’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 중동 평화구상 작성을 주도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도 지난해 6월 ‘두 국가 해법’에 대해 “그 방안으로 협상이 성사될 수 있었으면 진작에 이뤄졌을 것”이라며 사실상 이를 부정했다.
먼저 국경과 관련해 중동 평화구상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정신’에 입각해 국경을 재설정한다”고 밝히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국경이 그려진 ‘개념 지도’를 첨부했다. 1967년 11월 22일에 채택된 유엔 결의 242호는 이스라엘이 같은 해 3차 중동전쟁 때 점령한 모든 영토(가자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1967년 이전 국경’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동 평화구상은 △이스라엘의 안보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아랍인ㆍ유대인의 강제 인구 이동을 피해야 한다 등의 조건을 달면서 242호 규정과 달리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15곳에 대해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했다. 이스라엘이 향후 4년간 추가로 정착촌을 건설하지 않는다는 단서만 달았을 뿐이다. 이는 1978년 제정된 법률을 바탕으로 40여년간 유지했던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은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뒤엎고 유대인 정착촌을 공식화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인 역학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중동 평화구상은 또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1967년 이전 영토’를 100퍼센트 제공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간) 토지 교환을 통해 1967년 이전 영토에 준하는 규모의 토지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주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정착촌을 떼어주는 대신 이스라엘에게서 받게 될 지역은 거주 자체가 어려운 네게브사막 일부 지역이다.
가장 첨예한 갈등 사안인 예루살렘의 지위와 관련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완전한(undividedㆍ분리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수도로 남을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줬다. 중동 평화구상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알 쿠드스(Al Qudsㆍ팔레스타인이 사용하는 예루살렘 명칭)는 팔레스타인 수도로서 각각 국제적으로 승인받아야 한다”고 명기했다. 나름 애매한 중간자적 위치에서 고민한 흔적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을 것”이며 “이ㆍ팔 평화협정에 양 당사자가 서명하면 그에 따라 미국대사관을 알 쿠드스에 두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미 2017년 12월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법상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던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고, 이듬해 5월에는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역시 기본법 3조에 동예루살렘을 자신들의 ‘미래 수도’라고 규정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이 올드시티 밖 동예루살렘 일부 지역을 수도 ‘알 쿠드스’로 삼으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측 협상대표인 사입 우라이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무총장은 지난달 말 “팔레스타인 수도인 동예루살렘은 성전산(템플마운트ㆍ아랍명 하람 알샤리프) 등이 위치한 올드시티를 말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중동 평화구상을 ‘세기의 음모’라고 맹비난했다.
눈여겨볼 점은 이 방안의 발표 시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 28일 백악관에서 중동 평화구상 정치부문의 내용을 발표했고, 이 자리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참석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500억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을 골자로 하는 경제부문 내용은 지난해 6월 22일 먼저 발표됐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국 상원의 탄핵심판(2월 5일)과 이스라엘 총선(3월 2일)이 가까운 시기에 발표한 것이다.
1년 사이 세 번째로 치러진 이번 이스라엘 총선에서 네타냐후는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을 합병하겠다고 강조하는 등 보수 지지층 결집을 시도했고, 집권당인 리쿠드당은 최다의석 확보에 성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평화구상은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의 국내 정치일정에 맞춰 발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편 든 중동 평화구상 발표에도 중동 아랍국가들의 반응이 비교적 잠잠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랍연맹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인정’ 발언 때는 관련 긴급회의를 개최했고, 지난해 그가 ‘골란고원 병합 인정’ 발언을 내놓았을 때도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번엔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평화구상을 발표한 지 나흘 뒤에야 “팔레스타인인들의 최소한의 권리와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방안”이라는 비판 성명 정도를 내놨을 뿐이다.
도리어 아랍연맹 성명 발표에 앞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트럼프 대통령의 방안에 대한 적극 지지를 표명했고, 오만과 바레인 등도 일부 지지 의사를 밝혔다. 몇몇 아랍권 국가들의 이런 태도 변화는 미국ㆍ이란 갈등 고조 등 급변하는 역내 정세와 관련한 친미국가들의 위기감 표명으로 해석된다. 실제 수니파 주요국인 사우디ㆍUAE는 본래 팔레스타인 분쟁 등으로 이스라엘과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시아파 맹주인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부쩍 이스라엘과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아랍 국가들로부터도 소외받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세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교수ㆍ한국중동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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