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팔루 재건 현장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영국이 홍콩을 통해 부를 쌓았던 것처럼 한국에겐 팔루라는 기회가 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오지 않는가? (인도네시아) 서부는 일본이 먹었고 동부는 중국이 차지하려고 한다. 한국은 자카르타에만 머물 셈인가?”
부디(52)씨는 틈만 나면 답답함과 아쉬움을 담아 채근했다. 아직 2년 전 지진 피해의 상흔이 남아 있는 땅에서 그는 한국을 콕 집어 기회와 희망을 얘기했다. 중부술라웨시주(州)의 주도 팔루에서만큼은 인도네시아어로 경제특구(KEK)를 뜻하는 머리글자 두 번째 K가 ‘특별한(Khusus)’이 아니라 ‘한국(Korea)’이라고 KEK에서 일하는 부디씨가 강조했다. 주민들이 경제특구 대신 ‘한국경제지역’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팔루 경제특구는 인도네시아 진출 한인 기업 STM그룹과 팔루 지방정부 산하 기관 BPST가 8대 2로 투자해 개발하고 있다. 한국종합기술이 기본 설계를 했고, 딜로이트인도네시아가 자문을 맡았다. 2015년 인도네시아 정부가 지정한 경제특구 9개 중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 2018년 9월 팔루 일대를 뒤집은 지진과 쓰나미의 악재를 딛고 차근차근 성과를 일군 덕이다.
팔루 시내에서 만을 따라 북서쪽으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팔루 경제특구는 여의도의 5배가 넘는 넓이(15㎢)에 펼쳐져 있었다. 항만으로 이어지는 700m는 왕복 4차선 도로가 깔려 있고 추가 확장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입주 업체가 현지 2곳, 중국과 한국 1곳씩 총 4개에 불과해 전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스리니(57) 팔루 경제특구 사무소장은 “등록이 완료돼 입주가 예정된 업체만 현재 15곳”이라며 “중국이 5곳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현지 업체와 영국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 기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신속한 인허가 처리 및 세제 혜택, 풍부한 인력과 값싼 원자재 등에 더해 팔루 경제특구의 최대 장점은 무엇보다 지리적 이점”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에겐 한국인 한 명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숨진 ‘비극의 땅’으로 기억되지만, 팔루 일대는 사실 최적의 항만ㆍ물류기지 후보지다. 동갈라에서 팔루까지 길이 40㎞에 이르는 만은 양편 폭이 10㎞에, 수심은 20m에 달해 배들이 정박하기 좋다. 인도네시아 해군 잠수함 기지도 경제특구 맞은편에 있다.
팔루와 인근 동갈라 일대는 칼리만탄(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섬 사이의 마카사르해협, 발리섬과 롬복섬 사이의 롬복해협을 잇는 신(新)대양항로 중앙에 위치한다. 이 항로는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도 월리스가 1860년 두 해협을 경계로 동쪽(오스트레일리아구)과 서쪽(아시아구)의 생물 분포가 다르다고 발표한 뒤 훗날 명명된 ‘월리스선’과도 일치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이 선을 기준으로 팔루가 속한 인도네시아 동쪽 영토(술라웨시 말루쿠 파푸아)가 서쪽(자바 수마트라 칼리만탄)보다 낙후됐다고 여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전임자들과 달리 동쪽에 공을 들이는 까닭도 인도네시아 전체 지도자라는 위상을 얻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팔루는 인도네시아 신(新)수도가 바다 건너 서쪽 400㎞ 지점의 발릭파판 일대(스파쿠, 스모이)에 올해 7월부터 조성되면서 후광 효과도 노리고 있다. 각종 건축 자재들이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팔루에서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자동차 2차전지의 원료물질인 니켈 주산지도 중부술라웨시 지역에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자체 제련 능력을 높이고 생산 가격을 낮추기 위해 니켈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생산 업체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땅이라는 얘기다.
중국이 팔루의 가치를 알아보고 지난해부터 행동에 나섰다. 한인 기업이 부지를 개발한 덕에 민관 합동 투자 유치단이 2017년 말 방한까지 했으나 이듬해 지진으로 우리 기업들이 주춤한 사이 중국이 무섭게 빈틈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팔루 부시장을 지낸 물하난 BPST 대표는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 일대를 조사한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거점으로 낙점한 곳이 팔루”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엔 대규모 물류기지 및 항만 건설 투자를 저울질하던 중국 기업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덧붙였다.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인도네시아가 잠수함 기지까지 갖추고 준비하는 신대양항로는 해적이 준동하는 말라카해협의 대안 항로로 기능할 것”이라며 “우리가 국책사업으로 동갈라와 팔루에 수리 조선소 등을 짓는다면 신(新)남방 정책 차원에서 선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 교수는 반세기 가까이 아세안을 연구하고 체험하고 부대끼면서 족적을 남긴 국내 동남아 박사학위 1호다.
김성현 STM그룹 대표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라며 “팔루를 중국에 뺏기기 전에 한국토지공사(LH) 같은 공기업과 현대 등 대기업이 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공식 발표 전이라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다행히 몇몇 우리나라 대기업이 팔루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술라웨시 팔루ㆍ동갈라=글ㆍ사진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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