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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교장 선생님의 코로나 편지

입력
2020.03.03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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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에 만연한 페스트 전담 의사를 묘사한 판화.
17세기 유럽에 만연한 페스트 전담 의사를 묘사한 판화.

이탈리아에서 단테에 비견된다는 작가 알렉산드로 만초니(1785~1873)의 대표작 중 ‘약혼자들’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17세기 밀라노 부근 농촌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약혼한 남녀가 예비신부를 탐낸 영주의 결혼 방해와 압박을 피해 다니며 겪는 역경을 그린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맞춰 작가 장정일이 이 소설을 주간지 칼럼에 소환한 적이 있다. 교황이 한 대담에서 이 소설을 “세 번 읽었는데, 또 읽으려고 책상에 두고 있다”며 인생지침서처럼 평가한 대목을 인용하면서다.

□ 수도원에서 성장한 만초니 자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지만 소설에는 대립되는 성격의 두 신부가 조역으로 등장해 읽는 재미를 북돋운다. 영주의 압박에 못 이겨 주인공 남녀의 결혼식 주례를 포기하는 돈 압본디오와 그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실존 인물 페데리고 보로메오 추기경이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가 이 책의 서두를 외우라고 했다”는 교황은 “편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 존경받는 강력한 계급에 몸을 맡기는 것이 그가 성직자를 선택하게 된 충분한 이유인 듯”한 돈 압본디오를 경계로 삼았음 직하다.

□ 이 소설은 후반부에서 당시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밀라노 감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19의 이탈리아 내 집중 발생지 역시 밀라노가 포함된 북부 롬바르디아주다. 확진자가 2,000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50명 이상이다. 롬바르디아주를 중심으로 10여개 도시에 봉쇄 명령이 내려졌고, 해당 지역 학교는 일제 휴교 상태다. 그런 밀라노의 한 고등학교 교장이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학생들에게 띄운 편지가 화제라고 한다.

□ 교장은 편지에서 “독일의 알레만족이 밀라노로 가져올지 모른다던 페스트가 실제로 들어와 이탈리아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있다”는 ‘약혼자들’의 구절을 인용했다. 이어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 위협을 느낄 때 동료를 잠재적 침략자로 간주할 위험이 있다”며 군중심리에 혹하지 않는 ‘냉정함’을 주문했다. 그는 “이럴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만초니가 알려준 것처럼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독을 타는 것”이라며 학생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건강하다면 집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도 없다. 슈퍼나 약국으로 달려가지도 마라. 마스크는 아픈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같은 처지의 우리도 귀담아 들을 만한 말 같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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