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미국 언론에도 연일 보도되면서 동료들이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를 묻곤 한다. 조만간 미국에도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미국 질병관리예방본부의 발표가 나오고 나서는 미국 사회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아이도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주워들었는지 사다 두어야 할 생필품 목록을 만들었는데, 아빠를 위한 술도 그 목록에 있어 기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서인지 팬데믹을 소재로 한 2011년 영화 ‘컨테이젼’이 스트리밍 서비스 인기 영화 목록에 올라와 오랜만에 다시 보았는데, 영화 속 영웅들이 질병관리예방본부와 세계보건기구의 관료와 과학자라는 게 흥미로웠다. 정부는 딱 목욕물에 빠뜨려 죽일 수 있는 정도의 규모면 된다는 독설이 있을 정도로 정부에 대한 의심이 유난히 많은 미국사회에서 정부관료, 그것도 CIA나 FBI가 아닌 질병관리예방본부 관료들이 할리우드 영화의 주역으로 나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오히려 그런 관료들이 주목을 받는 경우는 뭔가 큰 사고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이고, 그들이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는 누구도 그들이 하는 일에 주목하지 않고 당연시 여긴다.
미국사회가 코로나19와 관련해 긴장해야 하는 진짜 이유가 평소 할리우드 카메라에 잘 비치지 않는 이 지루한 이름을 가진 정부기관들의 실태에 있다. 베스트셀러 저자 마이클 루이스는 ‘제5의 위험’이라는 책에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농림부나 에너지부와 같은 연방정부 부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각 부처 요직들을 자격이 심히 의심스러운 사람들로 채우거나 아예 채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정부 직책이 4,000개 정도 되는데 그 중 1,000개 정도는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이 자리들을 천천히 채우거나 아예 채우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임기 마지막 해인 지금도 가장 중요한 직책 743개 중 170개를 채우지 않고 있다. 국토 안보부의 경우는 35%만을 채웠고, 질병관리예방본부가 속한 부처도 72%만 채운 실정이다.
얼마 전 트럼프 행정부는 질병관리예방본부 예산을 16%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위험에 대한 최근 기자회견에서 이번 경험이 예산과 인원을 삭감하려는 이런 시도를 재고하게 만들 것 같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사업가인 자신은 평소에 불필요한 사람 수천 명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빠르게 인원을 재충원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과학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능력 있는 정부 조직 같은 제도와 조직을 망치기는 쉬워도 다시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지난 40년간 지속되어 온 정부 그리고 공공성 전반에 대한 공격의 첨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젊은 인재들이 정부에서 일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능력 있는 관료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정부 기관을 떠나는 현실에서, 전염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부기관을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다는 사업가 대통령의 호언이 미덥지 않은 이유다.
마이클 루이스는 책에서 대다수 미국인이 이름도 모르는 정부 부처에서 오랜 세월 헌신해 온 능력이 출중한 관료들 중 이민 1세대가 유난히 많다고 보도한다. 부유하고 안정적인 미국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달리, 이른바 ‘실패한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은 정부의 기본적인 기능을 당연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럴 듯한 설명이다. 공격적인 반이민정책을 펴는 행정부의 이민자 출신 관료들이 코로나19로부터 미국인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역설이 미국의 현실인 셈이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