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은 ‘숙청(肅淸)’의 원래 뜻을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이라 설명하지만 현실에서는 “정치단체나 비밀결사의 내부 또는 독재국가 등에서 정책이나 조직의 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파를 처단하거나 제거하는 행위”란 의미로 거의 굳어진 듯하다. 그리고, ‘쑤칭’이라는 중국어 발음으로 쓰일 땐 2차대전 일본이 싱가포르에서 자행한,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계 중국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 제25군이 2월 18일부터 3월 4일까지 보름여 동안 현지 중국계 시민 2만5,000~ 5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이른바 ‘쑤칭 대학살’이다.
1941년 12월 8일부터 영국ㆍ호주군을 상대로 말레이반도 공략에 나선 일본군은 싱가포르를 함락하면서 태평양전쟁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방대한 노획 물자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자니 그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해야 했다. 일본제국 육군 25군 사령부(사령관 육군 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싱가포르 함락 전 적성분자 색출ᆞ처단의 내부 기준을 마련했다. 항일 전력자와 중국 국민당정부 지원자, 영국 식민지 관료, 검문 불응자 등 국제 전쟁 규범에는 당연히 어긋나지만 전시임을 감안하면 있을 수 있는 기준이었다. 싱가포르 전역에 검문소를 마련했다. 중국계 성인 남성이 주요 검문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판이했다. 교사와 언론인 등 지식인 거의 모두가 ‘적성분자’였고,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은 ‘빨갱이’ 용의자였다. 현지인 밀정의 곱지 않은 시선이 곧 처형 선고였다. 다행히 검문을 통과한 이들도, 이마나 옷에 받은 ‘검사필(examined)’ 도장 없이는 나다닐 수 없었다. 전후(戰後) 일본은 처형자가 5,000명 미만이라고 주장했지만, 학계는 2만5,000명에서 5만명이라고 추정했고,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은 5만~10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7명이 기소돼 2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사태의 실질적 책임자로 알려진 작전참모 쓰지 마사노부(辻政信ㆍ당시 중령)는 도주해 재판을 모면한 뒤 우익 반공투사로 변신해 패전 후의 이력을 ‘잠행삼천리’란 책으로 출간해 이름을 얻고, 1952년 정계에 투신해 중의원과 참의원까지 지냈다. 그는 1961년 라오스에서 실종됐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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