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무력공격 유감 표명 없이
지도부 제재 해제 등 실질적 이득
아프간 정부와 협상서 갈등 불보듯
“트럼프 대선 위한 휴전” 비판도
“미군이 모두 철수하고 나면 과거 북베트남이 사이공(현 호찌민)을 전복했듯 탈레반도 아프간 수도 카불을 점령하려 할 수 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18년 만에 역사적인 ‘평화합의’를 체결했지만 항구적 평화를 단언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논의 과정에서 배제된 아프간 정부의 비협조만 봐도 합의 이행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아프간 정부는 “미군 공백을 틈타 아프간 정권을 탈취하려는 탈레반의 꼼수”라며 합의 의미를 일축하고 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평화합의 서명 소식을 전하며 “2조달러(약 2,420조원)의 전비가 투입되고 미군과 동맹군 3,5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미 최장기 전쟁 종식의 신호탄을 쐈다”고 성과를 나름 평가했다. 그러나 총평의 방점은 “(이번 합의는) 아프간에 엄청난 위험을 야기하고, 여러 측면에서 1973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 북베트남의 평화협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데 찍혔다. 닉슨이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 실질적 평화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우선 ‘대선용 출구전략’이란 비판이 많다. 트럼프가 ‘아프간 철수 공약’ 이행을 강조하기 위해 실익 없는 합의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합의문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탈레반이 얻은 게 더 많아 보인다. 탈레반은 염원하던 미군 철군과 지도부에 대한 제재 해제 약속을 관철시켰다. 반면 과거 무력공격에 대한 반성이나 유감은 일절 표하지 않고, 무장단체 알카에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선거를 앞둔 대통령이 ‘휴전’의 의미를 과장하고 나선 건 처음이 아니다”라며 과거 재선 도전에 나선 닉슨이 베트남전 피로감이 확산하자 평화협정으로 방향을 튼 것과 겹쳐 보인다고 꼬집었다.
또 합의 성패는 상대 의지에 달려있는데, 이미 탈레반은 아프간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터라 쉽게 물러설 가능성이 극히 낮다. 양측은 앞서 2018년에도 평화협상 초안을 마련했지만 탈레반의 차량 폭탄 공격으로 미군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최종 타결에 실패했다. 실제 탈레반은 이번 합의를 ‘승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날 도하 서명식장에서 탈레반 대표단은 “신은 위대하다”고 소리쳤고, 전날 탈레반 언론 책임자는 “흰색 터번이 백악관의 오만함을 무찌른 역사적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는 점도 변수다. 최근 재선에 성공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이 평화합의를 ‘트로이의 목마’로 악용할 수 있다고 꾸준히 경고해왔다. 위장 평화 전술로 아프간 내 영향력 재확대를 꾀하고 있다는 의미다. 당연히 불신에서 시작된 양측의 후속협상이 잘될 리 만무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탈레반과 세속주의 및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아프간 정부는 지향점부터 완전히 다르다. 신경전은 벌써 시작된 분위기다. 양측이 10일까지 이행하기로 한 포로 맞교환과 관련해 가니 대통령은 합의 이튿날 “탈레반 대원 5,000명 석방이 대화 개시의 전제조건이 될 순 없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그간 아프간 전쟁을 ‘끝없는 소모전’으로 비난해 온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민의 오랜 약속이 실현됐다”고 한껏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노심초사하는 속내도 읽혀진다. 이날 서명장을 찾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약속과 합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탈레반이 약속을 위반할 경우 미국은 합의 무효를 망설이지 않겠다”고 가니 대통령을 직접 달랬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