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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외쳐도 저마다 달랐던 ‘만세’… 봉기 이후 발본적 논쟁 피하지 말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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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외쳐도 저마다 달랐던 ‘만세’… 봉기 이후 발본적 논쟁 피하지 말았어야”

입력
2020.02.29 08: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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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1주년을 맞아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와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27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3•1 운동과 촛불혁명에 대한 대담을 진행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3•1절 101주년을 맞아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와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27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3•1 운동과 촛불혁명에 대한 대담을 진행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학계는 물론 전 사회에 걸쳐 3ㆍ1운동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3ㆍ1운동과 촛불혁명을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궤적에 놓고 해석하려는 시도도 그중 하나였다. 이에 한국일보는 3ㆍ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3ㆍ1운동 연구에 오래 천착해 온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와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만나 3ㆍ1운동의 눈으로 바라본 촛불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담은 2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진행됐다.

1919년 3ㆍ1 만세 운동엔 어린 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19년 3ㆍ1 만세 운동엔 어린 아이부터 백발 노인까지 참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3·1운동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권보드래 교수(권)=”우리나라는 근현대사를 통해 대중 봉기의 경험이 많은 나라다. 그중에서도 3ㆍ1운동의 폭발성은 압도적이다. 3ㆍ1운동은 마지막 민란이자 최초의 도시 봉기였다. 그만큼 전국적 범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근대적 지식인부터 봉건 시대 양반, 사회적 하층민, 학생, 남성, 여성 등 지식 수준이나 계급,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모여 유토피아를 꿈꿨던 경험이 3ㆍ1운동이었다. 유토피아라는 건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불만, 그리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갈망이 합쳐진 거다. 당시에 개개인이 품었던 불만과 갈망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지만, 새로운 세계가 열릴지 모른다는 희망 앞에서 모두는 하나였다. 해방과 변혁이란 의지의 불꽃이 점화된 장면이 바로 3ㆍ1운동이었다.”

이기훈 교수(이)=”세계성이라는 개념도 주목해 볼 만하다. 3ㆍ1운동이 벌어지던 그때는 전 세계적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꿈틀대던 단계였다. 힘 센 나라들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 국가나 정치적 결사체를 만들 수 있는 주권 국가라면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기존 세계를 재구성하겠다는 개념이었다. 3ㆍ1운동은 그런 변화된 세계 원리를 가장 빨리 체득하고 액션을 선보인 사례였다.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흔히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대인들은 이를 제국 체제로부터 이탈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문제로 확장해 봤다. 세계의 변화 흐름을 선도적으로 감지하고 공명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27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3•1 운동과 촛불혁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27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3•1 운동과 촛불혁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그럼에도 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권=”3·1운동 당시 사람들이 봉기에 참여한 이유는 다양했다. 이미 독립했다는 소문 때문에 나선 이들도 있고, 독립 후 불이익을 보지 않으려고 만세를 부른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독립과 자결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이 강렬했다. 구체적 쟁점, 생활 세계의 문제들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독립을 요구했던 다른 나라들에서 정치ㆍ경제적 개혁안들이 활발하게 논의됐던 양상과 대조적이다.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만세’를 부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봉기 이후다. 우리나라는 봉기까지는 참 잘한다. 불만과 갈망의 대중적 표현 자체가 많은 것을 바꾼다. 그러나 이후 변혁의 구체적 방법을 토의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의 지혜는 부족하다. 3ㆍ1운동은 일종의 거대한 국민투표의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렇게 출범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비롯한 정치적 장 어디서도 3ㆍ1운동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나가지는 못했다."

이=”3ㆍ1운동이 추구하던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내적 고민은 부족했던 것 같다. 다들 만세를 외쳤지만, 무엇을 위한 만세인지는 다 달랐다. 조선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제국독립 만세, 조선공화국 만세 등등 각자가 꿈꿨던 독립과 해방의 모습도 다 달랐다. 기미독립선언서만 해도 매우 추상적이다. 독립 국가의 정치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없다. 그런 까닭에 3ㆍ1운동 이후 여러 분열의 양상이 나타난다.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갈등의 요소가 폭발한 것이다. 3ㆍ1운동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유토피아에 대한 요구가 분화되지 않고 추상적으로 공유됐기 때문이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27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3•1 운동과 촛불혁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27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3•1 운동과 촛불혁명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3·1운동에서 촛불혁명까지 관통하는 교훈이 있다면.

이=”3ㆍ1운동부터 4ㆍ19 혁명,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87년 체제, 그리고 촛불까지 거대한 혁명적 과정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역사를 반드시 진화의 과정으로 보려는 것도 강박이다. 연속성은 역사적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분명 의미 있지만, 3ㆍ1운동과 촛불은 등치시키기 쉽지 않다. 촛불은 국민 주권이란 현존하는 규범과 제도가 흔들릴 때 그 가치를 다시 확증하는, 일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반면 3ㆍ1운동은 세상에 없던 규범과 제도, 이를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어 가려는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권=”우리는 봉기의 역사에서도 대의명분을 많이 찾는다. 외국의 경우 조세 저항이 봉기의 주원인인데, 우리는 민주, 정의 등 폼 나는 말들을 지키는 데 더 열을 올린다. 3ㆍ1운동은 운동 자체로서는 공존 가능성을 많이 보여 준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토의해야 할 많은 문제를 미뤄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종의 환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너도 정의(正義)를 사랑하지, 나도 정의를 사랑해. 그러려면 세금 얘기도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넘어가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못 갔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2016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사진은 촛불집회가 열린 광장을 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촬영한 것.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2016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사진은 촛불집회가 열린 광장을 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촬영한 것. 한국일보 자료사진

-봉기 이후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가꿔나가야 하나.

이=”혁명적 변화를 겪었다면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전망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시 ‘롤백(rollback)’ 한다. 4ㆍ19나 5ㆍ18이나 87년 체제, 촛불까지 민주성 주권 회복이라는 구호는 같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회 경제적 문제들은 밀려났다. 촛불 이후 들어선 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논의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적폐를 드러낸다고 켜켜이 쌓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한 발본적 논쟁을 회피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증오와 적대만이 상호 교차할 뿐이다.”

권=”주장과 명분의 추상성은 선악 구도와 통한다. 3ㆍ1운동 때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 악이 있었다. 민주화 시절엔 독재가 적이었다. 물론 촛불의 경우에도 문제적 정권이 있었지만,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결로 사회를 바라보는 건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적이 없거나, 아니면 적이 내 이웃에, 또 내 안에 있는 게 보편적인 상황이 됐다. 거기에 익숙해지고 공존 가능성을 찾아가면 좋겠다. 3ㆍ1운동은 1919년에는 유토피아를 향한 응집체였고, 2020년에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 문제를 보여 주는 역사적 참조가 될 수 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ㆍ임수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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