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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경주 최 부잣집과 ‘착한 임대인’

입력
2020.02.28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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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서울 망우본동 우림시장의 한 건물에 2, 3월 임대료 50%를 경감해준 임대인에 대한 세입자들의 감사글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 27일 서울 망우본동 우림시장의 한 건물에 2, 3월 임대료 50%를 경감해준 임대인에 대한 세입자들의 감사글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지만, 오히려 사정이 안 좋을 때 인심을 내어 귀감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주 최 부잣집이다. 최 부잣집의 발흥(發興) 시조는 조선 중기 무관 최진립이다. 전란에 공이 커서 무과 출신임에도 공조참판을 거쳐, 병자호란 전사 후엔 병조판서까지 추증됐다. 부친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 동량은 경주 일대 곳곳의 땅을 사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전답이 늘자 대부분 소작을 줬는데, 소작료는 수확 곡식의 절반만 받아 칭송받았다.

□ 동량의 후덕한 성품은 3대 만에 조선 최고 부자로 일어서는 아들 국선으로 이어졌다. 국선은 부친과 함께 논에 둑을 세우는 등 직접 농사지으며 자랐다고 한다. 전해지기로는 “재물은 거름과 같다.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는다”는 한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눔을 실천했다고 한다. 흉년에 농민들이 빌려간 쌀을 못 갚게 되자, 담보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죽을 쑤어 주변에 푸짐하게 나눠 줬다. 소작 수입의 3분의 1을 빈민 구휼에 쓰는 가풍이 이때 세워져 200년 후인 1900년대까지 이어졌다.

□ 최 부잣집의 나눔 정신은 단순한 선의라기보다는 깊은 통찰에 뿌리를 뒀으리라고 본다.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등의 가훈을 보면 공동체 사회와 함께 잘 살아야 가문의 번영도 떳떳하다는 확고한 의식이 있었던 듯 하다. ‘부(富)의 사회적 운용’을 중시했던 가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원으로 이어진다. 당대 최 부잣집 종손이던 준은 재산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바쳤고, 2018년 관련 문서들이 고택의 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 경기 부진에 코로나19 사태까지 덮쳐 자영업자들이 극심한 경영난에 빠지자 상가 소유주들이 세입자 월세를 자진 감면해 주는 ‘착한 임대인’ 운동이 일고 있다.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이 들끓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민간에서 난국 극복의 자발적 상생 노력이 출현한 것이 더 없이 반갑다. 경향 각지에서 사례가 잇따르자 정부는 임대료 감면분의 절반을 정부가 착한 임대인에게 지원하는 방안까지 추진키로 했다. 국난 때마다 백성이 앞장서 떨쳐 일어났던 우리의 뿌듯한 역사가 이번엔 최 부잣집의 ‘나눔 정신’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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