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이른 새벽 대전 동구 추동 가래울마을. 마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대청호의 잔잔한 수면이 나를 반기고 있다. 자욱하게 내려 깔린 물안개에 취할 즈음 시나브로 동이 터 온다.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신 빛의 향연을 펼치던 호수는 이내 그림자놀이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물 위로 솟은 왕버들 나무와 산 그림자를 그대로 흉내 내는 호수. 자연의 거울이 만들어낸 풍경이 마치 도화지를 접어다 펼친 데칼코마니 작품 같다.
‘반영(反映)’이란 무엇인가. 방금 닦아낸 거울처럼, 산을 비추면 산이 되고 나무를 비추면 나무가 되는 호수의 반영. 분명 한쪽은 진짜고 다른 한쪽은 가짜일 텐데, 둘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경은 비슷한 또 하나의 세상을 품고 있다. 어쩌면 현실과 이상의 공존일 수도 있겠지.
정지된 듯한 호수 속 세상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호수는 사람의 마음과 닮았다. 작은 바람에 술렁이고 떨어지는 나뭇가지에도 큰 파문이 인다. 분노와 절망, 슬픔과 기쁨, 잠시도 잔잔해질 수 없는 현실의 자극에 마음은 심하게 요동친다.
더구나 어둡고 답답한 소식이 세상을 짓누르는 요즘,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을 갖기가 어디 쉬우랴. 데칼코마니처럼, 어수선한 현실이 우리 마음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19’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잔뜩 움츠려 있으니 세상은 멈춘 듯 적막하고 작은 일도 크게 다가온다. 이런 때일수록 평정심이 그립다. 걱정과 분노를 넉넉히 받아줄 수 있는 호수, 잔잔한 마음이 절실하다.
불안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곧 동이 트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면 사라질 물안개에 불과하다. 자연의 이치라는 게 그러지 아니한가. ‘이 판국’에 대청호의 반영을 펼쳐 보이는 이유다. 평소 같았으면 때이른 봄나들이에 들떠 있을 2월의 마지막 주말, 외출은커녕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운 당신에게 잠시나마 위안거리가 되길 바란다.
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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