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가이자 교육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헬렌 켈러. 1880년에 출생한 그녀는 인문계 학사를 받은 최초의 시각·청각 중복 장애인입니다. 출생 후 19개월이 되던 해 그녀는 성홍열(scarlet fever)과 뇌막염을 앓으면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고 말았는데요. 언어를 익히기도 전에 청력을 잃은 터라 언어발달에 심각한 장애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다른 무엇보다도 정상적으로 말을 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은 절망을 느낀 헬렌 켈러.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로부터 멀리하게 하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멀리하게 한다”고 역설한 그녀는, 듣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소아 난청의 60~70%,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
언어를 익히기도 전에 발생하는 난청은 언어발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언어습득 시기 이전에 발생하는 난청의 약 60~70%는 난청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데, 신체에 별다른 이상 없이 순수하게 난청을 유발하는 유전자만 현재까지 122개가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매우 어린 나이에 선천적으로 난청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만 75개에 달하며, 이러한 유전자의 대부분은 달팽이관의 유모세포에서 발현됩니다. 바로 이 유모세포가 외부로부터 오는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전기신호는 청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유모세포가 일정 수준 이하로 손상되는 경중등도 난청의 경우에는 보청기로도 대화가 가능하고 언어 발달에 있어 큰 무리가 없게 됩니다. 보청기를 통해 소리를 증폭시켜 달팽이관에 넣어주면 전기신호가 어느 정도는 발생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보청기는 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장치일 뿐,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보청기의 효과를 보려면 유모세포가 일정 수준 이상의 기능을 해야 합니다.
반면, 고도심도 난청의 경우에는 유모세포의 손상이 일정 수준을 넘어, 소리를 전기신호로 거의 바꾸어 주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보청기를 통해 소리를 증폭시켜준다 하더라도 발생하는 전기신호가 미미하기 때문에 거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선천적으로 이러한 고심도 난청이 발생하게 되면 언어발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인지기능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이어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고도심도 난청에 대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채널 인공와우의 도입으로 고심도 난청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공와우 수술 시기 빠를수록 언어발달 지연 방지
인공와우란 손상된 유모세포를 대신해 외부의 소리를 전기신호로 변환시켜 신경원세포를 자극함으로써 소리를 듣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인공와우는 크게 환자 몸 속에 들어가는 내부장치(수신기와 전극)와 귀 바깥쪽에 부착하는 외부장치(어음처리기)로 나뉩니다. 외부의 소리를 외부장치가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고, 달팽이관 내에 삽입하게 되는 전극을 통해 청신경에 직접 전기를 자극하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에 인공와우 수술이 좋은 결과를 보일까요? 우선 인공와우는 난청의 원인이 달팽이관 내 유모세포에 국한됐을 경우에 매우 좋은 결과를 보입니다. 반면, 난청의 원인이 유모세포를 넘어선 신경원세포나 청신경, 혹은 뇌쪽에 있게 되면 그 만큼 수술 후 언어발달의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다행인 점은 대부분의 소아 고심도 난청이 유모세포에서 발현되는 유전자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술 시기만 늦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좋은 결과를 보이게 됩니다. 수술 시기도 중요하지만, 선천성 난청의 종류와 달팽이관 혹은 청신경 상태에 따라 적절한 형태와 종류의 전극(내부장치)을 선택하는 것 또한 청각재활 치료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내이-MRI 등 정밀의료로 조기 치료 가능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경우에는 내이-MRI 검사를 추가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특히 내이-MRI 검사를 통해 달팽이관의 기형이나 청신경의 기형 및 유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소아 난청 환자들이 인공와우 수술 시 전극을 선택하고 청각∙언어 재활 치료를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소아 고심도 난청 진단을 받았다면, 유전자 검사와 더불어 내이-MRI 등의 검사를 통해 정확한 분자유전학적 원인을 초기에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기 청각재활이 아이들의 정상적인 언어발달에 핵심적인 요소인 만큼, 정밀의료에 기반을 둔 수술 및 재활 치료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반면에 심고도 난청이 아닌 중고도 난청을 가진 아이들의 경우에는 보청기로도 어느 정도의 청각재활과 언어발달이 가능합니다. 다만, 고주파 쪽 청력이 나빠 보청기 증폭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ㅅ,ㅆ,ㅎ’ 등의 고주파 청취와 발음에는 문제가 생기면서 전반적으로 자음 정확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보청기를 꾸준히 착용한 후에도, 특히 고주파 증폭에 한계가 있어 자음 정확도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잔청(청력이 남아있는 상태)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인공와우 수술을 시행해 고주파 청취가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만 5~7세가 넘어가기 이전에 수술을 시행해야 만족할 수 있는 발음 향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보청기가 없는 시대에도 난청을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위인입니다. 만약 그녀가 10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역사가 바뀌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그녀가 말을 잘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평생 절망을 느끼는 안타까운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