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새 생명 기운이 겨우 싹트기 시작하는 동지로다, 동남풍이 있을 리가 있겠느냐. 이봐 장졸, 들어서라! 이 내 장창으로 황건, 동탁을 베고, 여포 사로잡아 사해를 평정하니, 그 아니 천운이냐.”
중모리 장단을 타고 승전을 다짐하는 호방한 목소리가 울린다. 간웅(奸雄) 조조다운 카리스마다. 그런데 무대 위 배우는 여성 소리꾼 박인혜다. 정동극장에 오른 판소리극 ‘적벽’(4월 5일까지)은 이번 공연에서 조조 역에 남녀 배우를 더블 캐스팅했다. 판소리 ‘적벽가’는 장중한 대목이 많아 ‘남자 소리’로 인식돼 왔다. 남성 소리꾼 안이호와 함께 조조로 낙점된 박인혜는 호쾌한 연기로 호평받고 있다.
요즘 공연계 화두라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다. 공연계 미투 운동 이후 여성 배우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기존 성 역할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가 늘어나더니 이젠 대세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적벽’은 주연만 그런 게 아니다. 소리꾼 배우 21명 중 10명이 여성이다. 해설자인 도창부터 공명, 조자룡, 주유, 정욱 등 주요 역을 여성에게 맡겼다. 정동극장 이수현 기획팀장은 “젠더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성숙되면서 관객들의 관람 태도와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며 “조조를 비롯, 소위 ‘센 캐릭터’들을 여성 소리꾼이 강인하게 이끌어 가는 모습에 관객들이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단순히 성 역할을 뒤집는 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통찰도 담아낸다.
뮤지컬 ‘데미안’(3월 7일~4월 26일ㆍ유니플렉스)은 고정된 배역이 없는 2인극이다. 남녀 배우가 짝을 이뤄 무대에 오르되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번갈아 연기한다. 남녀 각 3명씩 총 6명이 캐스팅됐고 배우 1명이 2가지 배역을 연기하기 때문에 배우와 배역의 조합이 18가지로 나온다. 극중 노래도 남녀 음역대에 맞게 2가지 버전으로 편곡했다.
이대웅 연출은 “헤르만 헤세의 원작에서도 싱클레어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 모두를 받아들인다”며 “성별 구분을 뛰어넘어 아예 그 경계 자체가 지워진 성 개념을 지향하는 동시에 개인이 스스로 성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캐스팅을 했다”고 말했다.
2인 연극 ‘언체인’(4월 7일~6월 21일ㆍ콘텐츠그라운드)도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잃어버린 딸 줄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크가 줄리의 실종에 대해 알고 있는 싱어의 흐릿한 기억을 쫓아 조각난 기억들을 맞춰 가는 이야기다. 마크 역을 남녀 배우 2명씩 총 4명이 번갈아 연기한다. 싱어 역도 마찬가지다. 마크와 싱어를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남-남, 남-여, 여-여, 여-남 등 다양한 구성으로 만날 수 있다.
제작사 콘텐츠플래닝은 “젠더 프리 캐스팅을 함으로써 이전에는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인물 간의 관계나 심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이로 인해 공연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근 공연 중인 뮤지컬 ‘셜록 홈즈: 사라진 아이들’(4월 19일까지ㆍ광림아트센터)에서도 소설 속 셜록의 파트너인 왓슨은 ‘제인 왓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캐릭터로 바뀌었다. 국립극단의 70주년 기념 작품 ‘파우스트’(4월 3일~5월 3일ㆍ명동예술극장)에선 여성 배우 최초로 김성녀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파우스트 박사 역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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