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코로나19사태와 종교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신천지교단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슈퍼전파자로 떠올랐다. 좁은 공간에서 밀착식 예배를 드리고 신도들이 거의 매일 교통(交通)하는 독특한 문화 때문이란다. 방역당국은 이들이 신분과 행적을 감추고 있어 감염원 추적에 애를 먹고 있다. 이들이 잠입시킨 ‘추수꾼’으로 인해 애먼 제도교회들까지 행여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교주인 이만희씨는 신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눈에 보이는 신
‘이단’만이 아니다. 기성교단의 목사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창원의 어느 목사는 “중국 시진핑이 하나님 눈에 악한 정책을 만들었다”며 “전염병은 범죄한 백성들과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하나님이 지금 중국을 때리고 시진핑을 때리는 것”이라 주장했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대형교회 목사들의 주옥 같은 망언들. 그들에 따르면 동남아 쓰나미는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뉴올리언스 홍수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재해를 ‘신의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히 중세적이다. 중세인은 신이 자연의 운행에 직접 개입한다고 믿었다. 이 믿음이 얼마나 끈질겼는지 근대에 들어와서도 과학논문에 신이 등장하곤 했다. 태양계의 운동을 역학으로 설명한 뉴턴마저도 이 운동의 ‘원동자’로서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았던가. 과학에서 신이 사라진 것은 19세기의 일. 태양계 형성에 관한 라플라스의 논문을 읽은 나폴레옹이 저자에게 ‘왜 논문에 신이 빠져 있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제게 신이라는 가설은 필요 없습니다.”
그 후 신은 구약의 말씀대로 ‘숨은 신’이 되었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오늘날 우리는 자연의 설명에 신이라는 가설을 사용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빅뱅이론으로, 창조론은 진화론으로 대체되었다. 코로나19도 발생의 원인부터 확산과정, 나아가 치료법까지 과학의 힘으로 얼마든지 밝혀낼 수 있다. 그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굳이 신이라는 가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자연의 모든 현상은 이미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거나, 언젠가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럼 신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저 “숨어 계시는” 것뿐이다.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지구 궤도를 돌며 ‘여기 우주에 신은 없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소련 정부의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세례를 받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아폴로11호의 비행사들도 달에서 신을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암스트롱과 함께 월면차를 탔던 올드린은 교단의 허락을 받아 달 위에서 혼자 성만찬식을 올렸다. 지금도 신은 존재한다. 그저 보이지 않게 숨어 계실 뿐.
◇숨은 신을 끌어내는 사이비종교
우주비행의 시대에도 여전히 신이 살아 있는 이유는 뭘까.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물음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가령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과학은 완벽히 무력하다. 이때 종교는 인간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한다.
삶의 근원적 부조리는 어쩔 것인가. 천하의 악당이 부귀를 누리고, 선한 자들은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한다. 인간의 정의를 피한 자들은 신의 심판에 맡길 수밖에. 그래서 종교는 천국과 지옥을 발명한 것이다. 그 일을 과학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인간의 과학이나 기술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 너머의 일들을 우리 연약한 인간들은 신에게 맡긴다. 때문에 진화론을 가르치는 생물학자, 빅뱅이론을 가르치는 물리학자가 교회에 나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외려 ‘창조과학자’들이야말로 뿌리깊은 무신론자들이다. 성경에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했거늘, 온갖 궤변으로 신앙의 눈에 뵈는 증거를 찾는 것은 신보다 과학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리라.
사이비종교일수록 숨은 신을 끌어내 사람들에게 현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여러분 중 바이러스 걸린 사람이 있느냐. 그럼 다음 주에 예배에 오라. 주님이 다 고쳐주실 것이다.” 직접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전광훈 목사의 말이다. “대구 목사님들, 정부가 예배 두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당신들이 목사들이냐.” 흑사병이 돌던 시절 중세인들은 역병을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라 믿고 교회에 모여 집단적으로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신은 이들을 고쳐주시지 않았다.
신의 ‘존재하심’을 믿는다는 것이, 고작 하얀 수염 달린 이가 저 하늘에 우리를 늘 내려다본다는 유치한 판타지를 믿는 것일까. 신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는 것이 고작 그 영감이 수틀리면 이 땅에 역병을 내린다는 황당한 스토리를 믿는 것일까. 하나님을 인간이 과학이나 기술로 해결해야 할 영역에까지 개입하는 주책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신을 희화화하는 독신(瀆神)일 뿐이다. 숨은 신은 하늘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우리 안의 ‘저 깊은 곳’에 계신다. 그리고 거기서 역사하신다.
◇기독교, 중세적 광신에서 벗어나야
25년 전 유학 중에 다니던 교회의 성도가 내게 고민을 털어놨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를 시켜줄 테니 1억을 내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이다. 바로 며칠 전 그가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신앙간증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터라 그에게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예수님이라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아요?” 말리셨을 것 같단다. 그럼 하지 말라고 했더니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걱정이다. 걱정하는 그에게 마태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25-34)
그러니 걱정할 것 없이 “먼저 그의 의”를 구할 일이다. 공중의 새와 들판의 백합까지 돌보시는 분이 하물며 우리를 외면하시겠는가.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약속을 믿어야 한다. 신비체험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방언의 은사를 입었다 한들 사는 방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신을 안 믿는 것이다. 곤궁과 핍박이 예상되더라도 말씀을 믿고 “먼저 그의 의”를 구할 때 비로소 이 땅에 “그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신은 이렇게 숨어서 세상에 ‘역사’하신다.
성서와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지역적ㆍ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때문에 신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날의 한국인을 위한 메시지로 번역하는 데에는 정교한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이비목자들에게 그런 해석학적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서를 축어적으로(글자 그대로) 읽는다. 그 결과 고대인의 세계관이 현대를 사는 신도들의 머리를 지배하게 되고, 맹신과 광신에 빠진 신도들은 종교적 상징과 비유를 그대로 물리적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코로나여 물러가라.” 방역이 심각 단계로 올라가던 날 한기총 회장은 광화문에 신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외쳤다.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한 예수의 기세다. 신천지와 한기총은 서로 적대하나, 두 단체의 총회장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이 세상의 신”(고후4:4) 노릇을 한다는 점이다. 전광훈 목사는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 종교성의 현대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개신교 일각의 이 중세적 광신이야말로 이 땅에 횡행하는 수많은 이단들의 밑거름인지도 모른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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