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두 번 받은 이는 네 명이다. 프랑스 화학자 마리 퀴리(물리, 화학), 미국 물리학자 존 바딘(물리 2번), 영국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화학 2번), 그리고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Linus C. Pauling, 1901.2.28~1994.8.19)이다. 폴링은 54년 양자역할을 응용해 분자 결합구조를 규명한 공로로 1954년 노벨 화학상을 탔고, 2차 대전 종전 직후부터 반핵 평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62년 노벨 평화상을 탔다. 전혀 다른 분야의 노벨상을, 그것도 공동수상이 아닌 단독으로 탄 이는 폴링이 유일하다.
세계적 과학자인 그가 정작 고교 졸업장은 45년이 지나서야 타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영민했던 그는 15세에 고교 졸업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오리건주립대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미국사 의무이수학점을 채우지 못한 게 문제가 됐다. 그는 고교 졸업장 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학부 과정을 마치기 전부터 모교의 강사로 강의를 맡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오펜하이머의 제안을 뿌리치며 핵 개발에 반대했던 그는 전후 냉전 매카시즘 기세와 사찰ㆍ탄압에도 아랑곳 않고 반핵 연설을 하고 다녔고, 노벨상 수상 직후부터는 기 수상자 등 과학자들의 반핵 서명을 받아 1958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당연히 매카시의 미 의회 ‘비미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즉 비미국적인 행위를 일삼는 공산주의자 및 노동운동가에 대한 조사 청문회에 소환당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비(非) 미국적 행위’는 물론, 반핵활동이었지만, 조사위원들의 눈에는 그가 고교 의무과목인 미국사를 이수하지 않은 것도 꼬투리가 됐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10세 때, 한 친구(Lloyd Jeffress, 전 텍사스대 실험심리학과 교수) 집에 놀러 갔다가 화학 실험키트를 본 뒤 화학 외에는 눈에 차는 게 없었다는 그는 집 지하실에 자기만의 실험실을 꾸려 인근 농장의 우유 성분을 분석하며, 비록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우유 품질 개선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신장 질환을 앓았던 만년의 그는 학계의 조롱을 받아가며 비타민C의 항암 및 수명연장 효과 등을 역설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만 93년을 살고 전립선암으로 별세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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