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세계화
지구적 차원에서 인류사를 쓴다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역사는 훗날 ‘세계화 시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하나의 촌락을 이뤄 살아가는 시대가 세계화 시대다. 지난 70여년 동안 국민국가의 경계는 글로벌 가치 사슬이나 지구 문화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갈수록 약화돼 왔다. 오늘날 국민국가의 안과 밖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에서 시작한 ‘코로나19 사태’가 대다수 나라들에서 주요 정책 과제의 하나가 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세계화 시대의 개막과 진전
세계화(globalization)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그 이전엔 국제화(internationaliziation)가 널리 사용됐다. 두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국제화가 국민국가들 간 교류가 양적으로 증대한 것을 뜻한다면, 세계화는 그 교류가 질적으로 전환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
세계화의 분석 단위와 활동 단위는 국민국가를 넘어선 세계사회 전체다. 예를 들어, 애플과 삼성의 경제 활동 무대는 지구 전체이고, 봉준호 영화와 방탄소년단(BTS) 노래가 메시지를 발신하는 대상도 지구 전체다. 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일찍이 말했듯, 국민국가는 삶의 거시적인 문제들엔 너무 작고 미시적인 문제들엔 너무 큰 것이 돼 버렸다.
세계화를 이끌어온 두 힘은 경제의 세계화와 문화의 세계화다. 경제의 세계화는 교역ㆍ투자ㆍ통신의 확대로 국가 간 상호의존이 증대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다자간 협의ㆍ조정ㆍ협력이 강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초국적기업들은 생산부문을 지구적으로 재배치하는 신국제분업을 통해 국민국가 국경의 의미를 축소시켜 왔다.
경제의 세계화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지만 노동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철폐하려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강화돼온 반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은 교섭력을 상실해 왔다.
문화의 세계화는 문화의 생산ㆍ분배ㆍ소비의 지구적 체제가 구축되고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뉴스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대중음악, 전신 및 통신 프로그램은 전세계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세계시장에서 판매돼 왔다. 이러한 문화의 지구적 재구조화는 그 어떤 서구의 정책 및 기술보다도 일상적ㆍ문화적 삶과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는 점에서 세계화 경향을 가속화시켜 왔다.
속도가 더디지만 정치의 세계화도 주목할 만하다. 정치의 세계화는 국제연합(UN),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무역기구(WTO) 등과 같은 정부 간 조직들과 ‘국제사면위원회’, ‘그린피스’, ‘국경 없는 의사회’ 등과 같은 비정부조직들에 의해 주도됐다. 이 초국적조직들은 정치ㆍ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교통ㆍ통신ㆍ과학ㆍ환경 등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초국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이렇게 진행돼온 세계화에서 주목할 것 가운데 하나는 지구적 불평등이다.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에 대해선 서로 다른 견해가 맞서 왔다. 한편에선 세계화와 함께 국가 간 불평등이 강화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그 불평등이 완화됐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통계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자의 주장은 개별 국가의 인구 규모를 고려하지 않은 반면, 후자의 주장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의 성장을 고려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두 국가의 경제성장에 따른 국민소득의 증가가 국가 간 지구적 불평등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20년대와 세계화의 미래
승승장구하던 세계화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였다. 세계화에 대한 명백한 거부는 포퓰리즘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 포퓰리즘은 반엘리트주의와 반다원주의의 특성은 물론 방어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 특히 서구 우파 포퓰리즘은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켜 왔다. 그 동안 세계화 시대에 약화돼온 것으로 보였던 민족주의가 다시 힘을 얻어 소생하는 것이 오늘날 지구사회의 풍경이다(민족주의에 대해선 다음 주에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 오늘날 세계경제는 하나의 경제로 통합돼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 기업은 자본ㆍ노동ㆍ원재료를 지구적 차원의 사슬로 엮어 상품을 생산해내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가치 사슬은 이제 완전히 자리 잡았고, 앞으로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세계경제를 이끄는 것은 정보통신기술이다. 더하여 인공지능을 위시한 제4차 산업혁명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보통신기술과 제4차 산업혁명은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지구적 정보사회’에 기반해 있다. 이러한 현실은 지구적 차원의 경제적 경쟁이 치열해질지언정 경제의 세계화가 후퇴하진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문화의 세계화 역시 역전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의 세계화는 처음부터 이중적 층위에서 진행돼 왔다. 할리우드, 디즈니, 맥도날드의 세계화에서 볼 수 있는 ‘미국문화의 세계화’가 한 층위라면, 미국문화와 자국문화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문화’가 또 다른 층위를 이뤄 왔다. 예를 들어, 미국적 양식과 한국적 현실이 결합한 우리나라 힙합 뮤직은 문화의 세계화가 가져온 하이브리드 문화의 하나다. 미국적 생활양식의 지구문화와 제3의 문화로서의 하이브리드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자면, 오늘날 정치 영역을 제외하고 세계화는 후퇴하지 않았다. 이러한 흐름에서 외려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의 세계화와 정치의 세계화 간의 긴장 및 갈등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경제 영역에선 세계화가 강화되는 반면 정치 영역에선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세계화 내 갈등적 강화’ 경향이 우리 시대 세계화의 자화상일 것이다.
2020년대 세계화의 미래에선 이러한 갈등적 강화 경향이 더욱 증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이 갈등적 강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미중 무역갈등이다. 세계경제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진행돼온 미중 무역갈등은 결과적으로 다른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이 민족주의가 포퓰리즘과 결합해 2020년대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이 분출하는 시대가 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에 대한 정치적 대안으로 ‘글로벌 거버넌스’의 중요성이 꾸준히 강조돼 왔다. 지구적 경제와 문화가 하나로 결합된 상황에 대응해 정치 영역에서 지구적 문제들을 다루는 국가 간 의사결정의 거버넌스가 활성화되고 강화돼야 한다는 논리다.
지구적 차원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 등에서 볼 수 있듯 계속 작동해 왔다. 문제는 이러한 글로벌 거버넌스 기구들이 지구적 금융위기, 기후변화, 테러리즘 등의 이슈들에 대해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다. 2020년대 세계화에 부여된 과제 중 하나는 바로 이 글로벌 거버넌스의 일대 혁신과 그 대안적 구조를 일궈가는 데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와 세계화
우리 사회에서 세계화가 큰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당시 김영삼정부는 세계화를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세계화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였다. 이 두 사태를 통해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는지를 생생히 경험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국가 규모와 경제 구조를 지켜볼 때, 세계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선택 사항을 넘어선 필수 항목이라는 점이다. 박세일이 ‘창조적 세계화론’에서 제시한 ‘서울 컨센서스 10대 전략’은 이 문제를 고민한 대표적인 정책대안이다. 박세일은 중도우파적 관점에서 지구촌과의 통합을 확대하되 성장ㆍ분배ㆍ환경의 공생적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2020년대 세계화의 미래를 내다볼 때, 앞서 지적한 ‘세계화 내 갈등적 강화’가 증대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전략적 방향은 ‘개방과 복지의 선순환’ 구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에 대한 개방 전략이 가져다 줄 경제적 이익으로 국내적 복지를 강화시키는 정치적 성과를 어떻게 일궈낼 것인지에 대해 우리 정치사회와 지식사회는 좀 더 고민하고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민족주의’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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