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캐슬, 사실은?] 사건 배경 등 나열한 ‘서론’부터 ‘각주’ 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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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캐슬, 사실은?] 사건 배경 등 나열한 ‘서론’부터 ‘각주’ 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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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4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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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공소장은 왜 자꾸 길어질까

※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2월 열린 보석 심문기일에서 사법농단 공소장에 대해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300여페이지나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기일에 출석하고 있는 양 전 대법원장. 홍인기 기자

“1974년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 여성. 아버지는 북한 공작원으로 특수부대에서 남파훈련을 받고 남한에 침투했다가 피살됐다. 유공자 딸인데다 어릴 적부터 학업 성적이 우수해 15세 때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추천으로 공작원 양성학교인 금성정치군사대학에 들어가 돌격대 간부 교육을 이수했다.

이후 특수부대에 입대해 2년 넘게 독침 뿌리기, 표창 던지기, 산악훈련, 얼음물에서 오래 버티기 등 남파훈련을 받으며 ‘인간병기’로 성장했다. 드디어 27세가 되던 2001년 남한의 미군기지를 촬영해 오라는 지령을 받아 들고 아버지 대를 이어 남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게 됐다. ‘그 어떤 유혹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내용의 충성맹세문까지 작성하게 되는데…”

◇전기(傳記) 방불케 하는 공안사건 공소장

영화 ‘쉬리’의 여간첩 이방희(김윤진 분)를 떠올리게 하는 이 화려한 프로필은 사실 이명박 정부 최대의 공안사건이었던 2008년 여간첩 원정화(46)의 공소장에 등장하는 내용 중 일부다.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원씨는 2008년 8월 군사기밀을 북한에 넘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공개된 원씨의 공소장에는 그의 범죄행위만 담긴 것이 아니라, △출생과 가정 환경 △혹독한 훈련 과정과 결혼생활 △북한에서의 전과 등 그의 일생이 총망라돼 있었다. 공소장 전반부는 ‘검사가 대필한 자서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검찰이 공소장에 이처럼 피고인의 일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음모 등 공안사건을 처리할 때 활용하는 방법이다. 수사 과정에서 물증보다 자백에 의존했던 만큼, 공소장을 쓰는 공안 검사들은 피고인의 생애와 범행 동기를 보다 자세히 드러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공안통이었던 한 전직 검사는 “판사에게 유죄 심증을 갖게 하려면 공안사건 공소장은 매우 길고 장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검찰 공소장

◇갈수록 길어지는 공소장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이외에 다른 서류ㆍ증거는 첨부할 수 없도록 하는 ‘공소장 일본주의’가 자리잡으면서, 최근에는 공안사건이 아닌데도 단행본 한 권 분량에 이를 만큼 긴 공소장이 등장하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은 296쪽에 달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 분량은 다스의 설립 시점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명박 전 대통령 공소장(259쪽)보다도 두꺼웠다. 총 47개에 달하는 양 전 대법원장의 범죄사실 앞에는 ‘기초사실’이란 제목으로 △재판 독립의 원칙 △사법행정의 한계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한 배경 등이 나열된 ‘서론’도 포함돼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공소장에도 한 페이지가 넘는 배경사실(피고인의 지위, 범행 동기 등)이 등장한다. 조 전 장관의 두 자녀가 고교를 졸업한 뒤 수년간 대학과 대학원 입시를 치르는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돼 있는데, 뒤이어 펼쳐질 입시 비리를 가늠케 하는 ‘예고편’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나 조 전 장관 공소장을 보면 범죄의 구성요건(위법한 행위를 규정한 요건)만 맞춰서 썼던 예전 공소장과 크게 다르다”면서 “형식만 보면 소설이나 논문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최근 법정에서 공소장 일본주의 논란이 자주 생기는 것도 이런 공소장 스타일 때문이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재판 시작 전부터 판사에 예단을 심어주는 것을 방지하고, 법정에서 검찰과 피고인간의 공격과 방어만으로 심증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다. 범죄동기 역시 살인죄나 방화죄처럼 ‘왜 범죄를 저질렀는가’ 그 동기가 중요한 경우에만 기재하도록 허용된다.

지난 11일 과천정부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공소장 비공개 방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뉴시스

◇검사들 “긴 공소장이 꼭 나쁜 공소장 아냐”

범죄행위만 쓰도록 되어 있는 공소장이 길어진 배경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다. 검찰 내에서는 하나의 공소사실을 ‘한 문장’으로만 쓰던 극단적 만연체 형태의 공소장 작법이 사라졌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이전에는 “피고인은 ~하는 자인 바,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아니한 채~한 것이다”와 같은 긴 문장으로 마침표 없이 공소사실을 이어 쓰는 게 관행이었다. 이에 대검찰청은 2007년 공소장, 불기소 처분서 등 검찰 결정문을 짧고 쉽게 쓰도록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 2009년 ‘새로운 검찰결정문 작성례’가 일선청에 배포되면서 각주를 다는 것도 보편화됐다.

그러나 이 같은 지침이 되레 검사들에게 ‘창작의 지평’을 열어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구성요건에 맞춰 한 문장으로만 썼던 공소장 대신, 얼마든지 문장과 문단을 나눠 쓸 수 있는 자율성이 부여됐기 때문이다. 부장검사 등이 공소장을 ‘첨삭’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한 현직 차장검사는 “과거에는 결재를 담당하는 간부가 빨간펜으로 공소장을 고치곤 했는데, 틀이 짜여진 긴 공소장은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2020-02-23(한국일보)

다만 공소장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공소장 일본주의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검사들의 목소리다. 한 현직 검사장은 “공소장은 일종의 공적 문서”라면서 “판사가 예단을 갖지 않게 하려면 오히려 사건의 배경을 충분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간부급 현직 검사도 “너무 길면 곤란하겠지만 국민 관심이 많은 사건이라면 입증된 사실들을 충실히 담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소장의 길이가 검찰에 대한 신뢰와 반비례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유ㆍ무죄가 검사실이 아닌 법정에서 가려지는 공판중심주의가 정착됨에 따라 피고인들이 검찰의 수사결과를 적극 반박하는 경우가 늘었고, 검사도 법정에서 치열한 법리다툼을 벌여야 하는 만큼 검사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공소장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공소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점점 분량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며 “검사도 피고인처럼 법정에서 ‘내 말을 믿어달라’고 간청하는 세상이 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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