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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캠코더도 모르던 기계치 김지운,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 같은 데뷔

입력
2020.02.22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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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장르 영화의 개척자 김지운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영화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영화계에 입문한 김지운 감독은 매번 다른 장르 영화로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입지를 다져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영화계에 입문한 김지운 감독은 매번 다른 장르 영화로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입지를 다져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지운 감독의 영화계 입문은 남달랐다. 그는 단편 영화로 입선한 영화과 출신이나 충무로의 전통적인 도제 시스템에서 경력을 다지며 입봉한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다방면의 영화를 섭렵하며 예술적 내공을 키워간 영화 독학자였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유년기부터 영화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지독한 영화광이었고 박학다식했지만 한량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탕 사먹어야 할 나이에 사탕 사먹을 돈을 초대권에 얹어 극장을 드나들었’고 TV프로그램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을 함께 보며 아버지로부터 영화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곤 했다고 한다.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는데 자전적인 글에 따르면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그림을 그렸다’거나, 화가가 되는 걸 반대한 아버지가 그림을 다 찢어버렸는데 ‘울면서 찢긴 그림을 이어 붙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편집 감각(?)을 키웠다’고 그는 회고한다.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은 산장을 운영하는 한 가족이 겪는 일들을 통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인생의 본질을 탐색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은 산장을 운영하는 한 가족이 겪는 일들을 통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인생의 본질을 탐색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백수 생활이 키운 창의력 

처음엔 배우가 되고자 서울예전(서울예술대학 전신) 연극과에 진학한 김 감독은 무대에서의 문제점을 명쾌하게 지적한 연출가 선배의 모습에 감명받은 나머지, 마음을 고쳐먹고 다음 학기에 연극 연출로 전공을 바꿨다. 그러나 교련시간 마지막 수업을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가서 날렸고 학적 변동이 되는 바람에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군대를 제대한 다음에야 제적당한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군복무 기간을 포함, 장장 10년 가까운 오랜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서른이 넘었는데 다 큰아들이 집에만 있으니 어머님이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 동회 같은 데서 일하면 얼마나 좋은 줄 아냐’ 그러시면 ‘아... 예’하고 아무것도 안했다. 그러다가 시나리오가 당선되어서 ‘엄마, 나 시나리오 당선됐어’하니까 슬픈 눈으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시더니 ‘이제 거짓말까지 하냐’ 그러셨다.”(김지운 저 ‘김지운의 숏컷‘)

그러나 김 감독이 본인의 술회처럼 이 시기를 순전히 백수로 보낸 건 아니었다. 연극 ‘로젤’과 ‘버자이너 모놀로그’ 등으로 유명한 연극배우인 누나 김지숙을 따라 연극계에 발을 들이면서 ‘아가씨와 건달들’에 배우로 서기도 했고, 1994년엔 연극 ‘뜨거운 바다’와 ‘가마다 행진곡’, 1995년엔 ‘무비 무비’의 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리며 ‘영화적인 냄새가 난다’는 평을 들었다.

일본드라마 ‘고교교사’를 한국적으로 각색한 이성수 감독의 ‘어린 연인’(1994)에 연출부로 들어가 영화 현장을 경험했고 광고 미술감독으로도 일했다. ‘공격적이고 암울한 기분을 한껏 품은’ 시절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장래를 생각해 독서와 영화 보는 것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비용을 마련해 유럽여행을 떠나 프랑스 유명 영화전문지 ‘카이에 드 시네마’ 창간 40주년 영화제가 한창이던 파리에서 장 뤼크 고다르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로베르 브레송의 작품을 비롯해 100여편의 영화를 보며 석달 가량을 소일하기도 했다. 이처럼 ‘백수 때 많이 보고 잘 놀고 (중략) 한 번도 쏟지 않았던 것이 무진장한 창작 욕구’로 돌아와 영화감독 김지운을 만드는 큰 바탕이 되었다.

김지운 감독은 공포영화 '장화, 홍련'(2003)을 탐미적으로 접근하며 한국 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해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지운 감독은 공포영화 '장화, 홍련'(2003)을 탐미적으로 접근하며 한국 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해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와도 같은 데뷔 과정 

1996년 2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만히 있는 차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낸 김 감독은 수리비 400만원의 목돈을 마련코자 마음을 다잡고 첫 영화 시나리오인 ‘좋은 시절’을 집필한다. 1980년대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을 고등학교 폭력 서클 간의 암투로 은유한 이 시나리오는 비록 영화화되진 않았지만 영화전문지 ‘프리미어’와 익영영화사가 주최한 공모에 가작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대학로의 한 분식집에 라면을 먹으러 들어간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식당 아줌마가 쟁반 대신 잡지를 그릇받침 삼아 들고 왔는데, 잡지는 ‘씨네 21’이었고 ‘시나리오 마감 일주일 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 5일 만에 쓴 시나리오가 바로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이었다. 마감 이틀 전 플로피디스크에 옮긴 파일이 손상되자 순전히 기억에 의지해 복구하고, 제출한 뒤에도 두 페이지 분량을 누락해 집에서 가져와 청테이프로 붙이는 해프닝을 빚은 이 시나리오는 제1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무사히 당선되었다.

“몇 가지의 사건, 사고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하나는 불륜과 관련된 생매장, 그리고 그 생매장을 둘러싼 연쇄살인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군부대 탈영병 때문에 저격병도 출동하고 총격전이 발생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중국집 배달부가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왜 하필 거길 지나다 죽었을까 싶은 게, ‘황당한 상황에서 맞는 죽음, 죽음의 불예측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2010년 11월, 제5회 런던한국영화제 인터뷰)

코미디와 공포를 혼합한 ‘코믹 잔혹극’을 표방했던 독특한 내러티브의 ‘조용한 가족’ 시나리오는 좀처럼 메가폰을 잡겠다는 감독을 만나지 못한 채 한동안 표류했다. 이때 명필름 측은 시나리오를 쓴 김 감독 본인의 연출의지에 주목해 감독직을 맡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스스로 캠코더 사용법도 모르는 ‘기계치’라고 밝혔지만 김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강한 자신감을 보이며 연출에 임했고, 1년여의 시간을 거쳐 세상에 나온 ‘조용한 가족’은 서울 관객 34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조용한 가족’은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아 세계 3대 판타스틱영화제로 꼽히는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 시체스영화제, 브뤼셀영화제에 모두 초청되었고, 그 중 판타스포르토영화제에서는 판타지아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영화는 훗날 일본 B무비의 대가 미이케 다카시의 ‘가타쿠리가의 행복’(2001)으로 리메이크 되기에 이른다. 뒤이은 ‘반칙왕’(2000)이 187만 관객이라는 히트를 기록하면서 김지운은 흥행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를 두 편밖에 안 했다는 생각도 든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 이렇게 한 편.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이렇게 한 편. 두 편씩 같은 성질의 영화들인 거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더 잘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씨네 21’ 2005년 4월 6일)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충성하는 한 남자의 고민을 누아르 스타일로 표현해낸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충성하는 한 남자의 고민을 누아르 스타일로 표현해낸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서사보다 장르 

옴니버스 영화 ‘쓰리’(2002)에 포함된 단편 ‘메모리즈’(2002)에서 공포영화의 가능성을 실험했던 김 감독은 ‘장화, 홍련’으로 장르와 스타일의 일대 변신을 시도한다. “전공 분야인 코미디를 그만두고 왜 공포물에 손대느냐”는 주변의 우려가 있었지만,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할 나이에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소녀의 심리’를 탐미적인 미장센 속의 억압된 분위기로 담아낸 ‘장화, 홍련’은 전국 314만명을 모으며 역대 한국 공포영화 최다관객수를 기록하게 된다.

이 작품은 김지운 필모그래피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전의 두 작품이 대사와 상황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 발을 걸치고 있었지만, ‘탐미적인 공포 실내극’을 추구한 ‘장화, 홍련’과 본격적인 누아르를 표방한 ‘달콤한 인생’을 기점으로 김 감독은 정교하게 짜인 미장센과 심미적인 이미지로 이야기의 톤과 정서를 조율하는 시각적 화술의 스타일리스트로 변모하게 된다.

특정한 장르에 고착되길 거부하는 김 감독의 영화적 실험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 모티브를 얻어 순제작비 170억을 투입한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을 찍었고, 두 번의 제한상영가 판정으로 논란이 된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 80년대 할리우드 B무비에의 헌사 격인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2013),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첩보물 ‘밀정’(2016)을 내놓았다.

이러한 야심은 리얼리즘과 서사를 중시하고 장르영화의 스펙터클을 경시해 온 한국 영화의 계보에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매번 장르의 껍데기를 갈아 치우지만, 김 감독은 항상 인간의 의도와 욕망대로 되지 않는 삶의 불가해함, 경계에 선 인물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는 일관된 주제의식으로 자신의 인장을 뚜렷이 남긴다.

장르 영화의 가공된 세계를 그리지만, 그 안에 삶의 보편적인 리얼리티를 담고자 하는 진지한 작가의 시선이 있다. 그리하여 김 감독은 장르의 개척자이자 한국 영화의 저변을 떠받치는 상업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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