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웡 닥 와(오른쪽) 말레이시아 사바ㆍ사라왁주 대법원장이 19일 말레이시아 최초로 AI를 도입한 재판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보르네오포스트캡처

19일 말레이시아 사바주(州) 치안법원 법정. 판사가 선고하기 전 대형 스크린에 연결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피고인이 소지했던 마약 무게, 직업, 나이, 범죄 경력 등을 입력한 뒤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징역 9개월이 떴다. 컴퓨터에 내장된 인공지능(AI)이 양형 기준과 그간의 판결을 토대로 순식간에 분석한 결과다. 판사 역시 AI의 권고대로 선고하고 법봉을 두드렸다.

20일 말레이시아 매체들은 이번 판결이 사법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잇따라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사법부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AI의 권고를 따른 판결”이라고 밝혔다. 다비드 웡 닥 와 사바ㆍ사라왁주 대법원장은 재판을 지켜본 뒤 “제조업과 기술 분야에 적용되던 AI가 드디어 법정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라며 “AI 시스템에 등록된 양형 기준과 2014~2019년 판결 결과를 공정하게 분석해 판사들의 시간을 아껴준 매우 깔끔한 판결”이라고 평했다.

AI의 판단이 재판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말레이시아 사법부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세 가지 측면을 분명히 했다. 먼저 판사는 AI로 대체되지 않는다. AI는 죄의 유무를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강간 사건과 마약 사건의 적합한 형량을 권고한다. AI는 조언만 할 뿐 최종 결정권은 판사가 갖는다. 실제 이번 판결을 맡은 판사는 다른 마약사범에겐 AI가 권고한 형량에 2개월을 추가한 징역 12개월을 선고했다.

무엇보다 법정 안 판사 도우미인 AI의 역할은 사람은 놓칠 수 있는 일관성과 신속성을 보장하는데 있다. 다비드 웡 닥 와 대법원장은 “AI를 활용해 데이터를 분석하면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 문제인 판결의 일관성 부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에서 AI는 당분간 강간 및 마약 사건 법정에만 등장한다. 축적된 데이터가 많아서다. 이어 교통사고 관련 소송에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법원 전체의 디지털화에도 AI가 활용될 예정이다.

이번 판결에 모두가 만족한 건 아니다. 피고인들의 변호사는 “AI를 재판에 들인 것은 연방헌법에 위배된다”라며 항소의 뜻을 밝혔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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