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부겐빌-파푸아뉴기니 무력충돌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988년부터 10년간 지속된 부겐빌-파푸아뉴기니 무력 충돌의 근간에는 세계적 매장량을 갖춘 부겐빌 팡구나 광산을 둘러싼 양측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내전 당시 부겐빌 혁명군이 팡구나 광산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 뉴질랜드 외교부 홈페이지 캡처

1988년 12월, 부겐빌에 배치된 파푸아뉴기니의 경찰기동대와 정규군은 지역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는 동경 141도를 기준으로 서쪽의 인도네시아와 동쪽의 파푸아뉴기니로 나뉜다. 20세기 초까지 네덜란드, 영국, 독일의 세 국가는 뉴기니를 삼등분해 식민지로 삼았다. 1975년 파푸아뉴기니는 이전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를 영토로 하여 독립국이 되었다.

부겐빌은 뉴기니 동쪽의 비스마르크군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 떨어진 섬이다. 충청남도보다 약간 넓은 부겐빌은 지리적으로는 솔로몬제도의 북단을 구성한다. 프랑스 최초의 세계일주에 성공한 프랑스 군인 루이 앙투완 드 부겡빌은 1768년 남태평양 항해 중 발견한 섬에 자신의 성을 가져다 붙였다.

 ◇바람 잘 날 없던 태평양의 섬 

1884년 독일은 뉴기니 북동부를 영토로 선언했다. 이어 1885년 주변의 비스마르크군도와 북부 솔로몬제도도 흡수했다. 솔로몬제도의 제일 큰 섬인 부겐빌은 이때부터 독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독일은 같은 해 부겐빌 북동 방향의 마샬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샀고 1899년에는 적도 북쪽의 캐롤라인제도와 더 북쪽의 마리아나제도까지 2,500만 페세타에 사들였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은 재빨리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를 공격해 차지했다. 부겐빌은 오스트레일리아 몫이었다. 1차대전 종전 후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의 마샬, 캐롤라인, 마리아나제도는 일본의 보호령이 되고, 남쪽의 뉴기니 북동부, 비스마르크군도, 부겐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부겐빌이 과달카날을 포함한 솔로몬제도의 남쪽 섬들과 합쳐지지 못한 이유는 영국이 나머지 솔로몬제도를 영토로 지배하던 탓이었다.

태평양전쟁 초반인 1942년 3월 일본군은 부겐빌에 상륙했다. 부겐빌에서 특수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20명 수준의 오스트레일리아 1독립중대는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일본군은 부겐빌에 여러 비행장과 정박지를 건설했다. 특히 섬 남쪽에 건설한 부인 비행장은 1942년 하반기의 과달카날 전투 때 일본군의 주요 기지로 사용됐다.

일본군은 부겐빌을 남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다. 지역 내 일본군 최대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비스마르크군도의 항구 라바울을 엄호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1943년 4월 18일 일본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참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대 격려차 최전방인 부인 비행장으로 향하다가 미군 전투기 P-38 라이트닝 편대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

부겐빌을 놓고 일본군과 미군은 격전을 벌였다. 1943년 11월 미군은 부겐빌 서쪽의 토로키나곶에 상륙했다. 약 14만 명 대 5만 명의 병력 차와 약 5대 1의 항공기 수 우세를 앞세운 미군은 일본군을 압도했지만 섬 전체를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1944년 11월 미군 대신 투입된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그럼에도 1945년 8월 항복 시까지 일본군은 부겐빌에서 전멸되지 않고 저항했다.

 ◇풍부한 자원은 하늘의 축복? 

2차대전 후 부겐빌은 뉴기니 동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에게 강제로 편입 당하고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 손에 떨어진 부겐빌이 독립을 열망함은 당연했다. 실제로 1975년 부겐빌은 독립을 선언했다.

부겐빌의 독립 선언에는 역사적인 이유 외에 경제적인 배경도 존재했다. 1960년대 말 부겐빌 중부 팡구나 지역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이 발견되었다. 노천광인 팡구나의 구리 매장량은 당시 세계 최대로 평가되었다.

1993년 영국 랭카스터대학의 리처드 오티는 ‘자원의 저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에 비해 오히려 경제성장이 더딘 경향이 있다는 의미였다. 비유하자면 태어날 때 주어진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는 얘기였다.

자원의 저주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첫째로, 돈을 너무 쉽게 벌기에 다른 산업을 키우려는 노력을 등한시했다. 둘째, 원자재는 가격의 변동성이 커서 국가의 재정 수입이 들쭉날쭉했다. 셋째, 소수의 사람이 국가의 부를 독점하는 부패가 곧잘 나타났다. 넷째, 자원이 고갈되면 국가 경제가 파국을 맞이했다. 다섯째, 자원의 소유를 놓고 내전이 일어나기 쉬웠다.

부겐빌에서 북동쪽으로 약 1,500㎞ 떨어진 나우루는 부겐빌처럼 19세기 후반 독일에게 병합되었다. 1900년 오스트레일리아인 알버트 풀러 엘리스는 나우루에서 대규모 인광석 광산을 발견했다. 인광석에는 비료와 화약의 주요 재료인 인산염이 다량 들어 있다. 20세기 초반부터 나우루의 인광석은 수출되기 시작했다.

나우루는 부겐빌과 비슷하게 1차대전 때 오스트레일리아가 점령했고 2차대전 때 일본이 점령했다. 2차대전 종전 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의 공동 보호령이 된 나우루는 1968년 마침내 독립했다.

경제적으로 나우루는 1980년대 초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인광석 수출은 나우루의 1인당 국민소득을 5만 달러 가까이 끌어올렸다. 자원으로 떼돈을 버는 또 다른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2위의 성적이었다. 1만여 명의 나우루 국민들은 사치에 가까운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나우루의 인광석은 무한대가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국가의 수입은 급격히 떨어졌다. 나우루 정부는 검은 돈을 처리해주는 조세회피처로 변신하려고 했지만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2017년 나우루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8,500달러로 줄어들었다. 나우루는 자원의 저주 네 번째 양태의 표본과도 같았다.

 ◇구리광산에 가로막힌 부겐빌 독립 

부겐빌의 경우는 나우루와 똑같지는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75년 9월에야 파푸아뉴기니의 독립을 승인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눈에 부겐빌은 파푸아뉴기니의 일부였다.

역사적이나 지리적인 이유 외에도 부겐빌이 파푸아뉴기니의 일부로 취급됨을 거부할 이유는 또 있었다. 부겐빌인들은 생김새도 파푸아인들과 달랐다. 즉 파푸아인의 피부색은 연한 데 반해 부겐빌인의 피부색은 훨씬 검었다. 부겐빌인들은 파푸아인을 ‘붉은 피부’라고 불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부겐빌의 독립에 부정적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산회사 리오틴토는 부겐빌구리회사를 설립하고 1971년 호주 주식시장에 상장시켰다. 부겐빌의 독립은 부겐빌 구리의 소유관계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컸다. 이는 곧 리오틴토가 가져갈 이익이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파푸아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더 부겐빌의 독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독립 전 부겐빌 구리의 이익 1.25%를 받다가 독립 후 재협상을 통해 20%로 올렸다. 독립한 파푸아뉴기니에게 팡구나의 구리는 수출액의 45%에 해당했다. 파푸아뉴기니는 받은 돈의 95%를 직접 갖고 5%만 부겐빌에게 주었다. 즉 팡구나 광산에서 발생하는 이익이 1,000억 원이라면 부겐빌이 갖는 돈은 그 100분의 1인 10억 원이 전부였다.

1975년 부겐빌의 독립선언은 공허한 메아리로 취급되었다. 파푸아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부겐빌의 독립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부겐빌에게 남은 선택지는 전쟁뿐이었다. 13년 후인 1988년 부겐빌은 섬 내의 파푸아뉴기니 병력에 공격을 개시했다. 부겐빌에게는 독립전쟁이지만 파푸아뉴기니 관점에선 반란이자 내전이었다.

부겐빌과 파푸아뉴기니 사이의 무력 충돌은 약 10년간 지속되었다. 각각 수천 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결에서 양쪽 모두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장이 된 부겐빌은 수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파푸아뉴기니는 1997년 영국의 용병회사 샌드라인을 돈으로 고용해 부겐빌에 투입하려고 시도했다. 샌드라인의 실전 투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개입으로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둘 사이의 휴전은 1998년 4월에 성립되었다.

2016년 1월 부겐빌 자치정부와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겐빌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를 관리할 위원회 설치에 동의했다. 2019년 12월 부겐빌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부겐빌 국민의 유효 표 중 98.3%가 완전한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결과는 참고사항에 불과했다. 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최종적인 결정 권한은 파푸아뉴기니 정부에게 있었다. 파푸아뉴기니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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