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진보적 정책일수록 급진적이지 않아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게티이미지뱅크

선거철에는 정치인의 이합집산이 두드러진다. 당이 해체되고, 신당이 만들어진다. 혼자 짐을 싸서 당을 옮기기도 한다. 이런 정치인에게는 보통 ‘철새’라는 불명예가 따른다.

경제학계에서도 정치인처럼 소신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거시경제학의 개척자 케인스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대공황 이후 소신을 바꾸면서 “저는 사실이 달라지면, 생각을 바꿉니다. 선생님은 어떠신지요?”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지상의 모든 ‘철새’들에게 엄청나게 힘이 되는 말이다.

경제학자의 변신은 지금도 계속된다. MIT대학교의 블랑샤르는 경제학계를 이끄는 사람의 하나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할 때 늘 균형재정을 강조했다. 그런데 지난해 전미경제학회 총회에서 자기 말을 뒤집었다. 시장금리가 낮은 상황에서는 국가채무 증가가 전혀 재앙이 아니라며 나랏빚 걱정을 잊으라고 충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빚어졌던 ‘바이백 소동’과 적정 국가채무비율 논란은 무색하기만 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바이백 프로그램’은 미국의 서머스 재무장관이 1990년대 초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서머스는 “재정적자 걱정보다 교육, 의료, 인프라 등 긴급한 사회현안 해결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재정확장론을 주장한다.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가장 쉽게 사상전향하는 분야가 재정정책이다. 경제학의 원래 이름이 정치경제학이고, 재정정책은 정치철학과 직결되기 때문이리라. 정치철학은 경제학의 정체성을 흔들기도 한다.

일찍이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조지 스티글러(198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는 “경제학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히 정치적으로 보수가 된다”고 단언했다. 그가 말하는 보수란 미국식 보수다. 시카고학파가 주도해 온 주류경제학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실증분석에 주력한다.

이에 비해서 영국에서는 경제학과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존 롤스의 ‘정의론’을 읽으며 토의한다. 미국 정치학과의 모습이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소득불평등과 경제정의가 경제학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제임스 멀리스(199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아마르티아 센(1998년), 앵거스 디턴(2005년) 등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들이 분배론에서 단연 두각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 경제학계는 가치판단을 외면하며 작은 정부에 집착하는 미국의 학풍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잘 알려진 대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경제학의 조류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흘러간다. 더불어 정체성도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경제학자들이 미국보다 더 급진적이지는 않다. 포퓰리즘에 물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소득불평등이나 경제정의를 강조하는 흐름이 곧 포퓰리즘 또는 급진은 아니다.

진보와 급진은 다르다. 오늘날 영국 노동당의 골격을 이룬 페이비언 협회가 그 예다. 진보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협회는 서두르지 않는 전술(지구전)로 유명한 로마의 파비우스 장군을 모델로 하여 완만한 사회변혁을 추구했다. 그래서 시스템이 망가진 영국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의 뉴딜 정책도 마찬가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보수성향의 대법원을 향하여 ‘사법개혁’이라는 으름장을 놓으며 최저임금제를 합헌으로 유도한 것은 분명 과격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뉴딜정책이 그다지 과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구정책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시민을 흙수저와 금수저(tramps and millionaires)의 두 계급으로 나눈 휴이 롱과 “모든 인민이 왕”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찰스 코글린 등 당대의 포퓰리스트들은 루스벨트를 수구꼴통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부유세 신설, 상속금액 제한, 전면적 연금제도와 무상교육 실시 등 달콤한 정책으로 대공황에 지친 유권자들을 경쟁적으로 유혹했다. 루스벨트는 그런 과격파들과 선을 긋고 뉴딜정책의 완급을 조절했다.

‘일반이론’에서 케인스는 기존의 주장들을 ‘고전이론’이라 부르며 폄하했다. 동료 교수들을 싸잡아 구태의연한 사람으로 낙인찍은 것이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면모다. 정치인이란, 생각이 다른 동업자를 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 아닌가?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후보자들끼리 상대의 전력을 들추며 ‘철새’라고 낙인찍는 모습이 흔해질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의 말대로 사실이 달라지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정상이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소신과 지조만 강조하면, 오히려 구태의연하기 쉽다.

유권자가 명심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우리 사회가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 분배와 노동 등 골치 아픈 분야에서도 용기를 내어 전진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영화 ‘기생충’ 열풍에서 보듯이 소득불평등은 이제 세계인이 공감하는 문제 아닌가?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이 빨라서는 곤란하다.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진보적 정책일수록 급진적이지 않아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페이비언 협회와 뉴딜정책의 성공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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