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세’ 도입 문제로 대립 중인 유럽과 미국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이번엔 인공지능(AI) 및 혐오 표현 콘텐츠 규제 정책을 두고 다시 맞붙었다. 유럽연합(EU)의 규제 강화 기조에 맞서 IT 업체들은 기술 혁신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유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로선 타협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워 미-EU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전망이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17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베라 요우로바 EU 집행위원회(EC) 부위원장을 만나 혐오 표현 등 잘못된 정보의 온라인 유통을 막는 데 필요한 플랫폼의 역할을 놓고 토론했다. EU는 연말까지 ‘디지털 서비스’ 법령 개정 여부를 확정할 계획인데 IT 기업의 책임 높이기 즉, 규제 강화가 핵심이다. 이 자리에서 저커버그는 기업이 직접 사용자 콘텐츠의 유해성 척도를 판별하기는 어려운 탓에 모든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규제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리도 폈다.
하지만 EU 측 입장은 완강하다. 요우로바 부위원장은 공식 성명을 통해 “페이스북은 모든 책임을 밀어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티에리 브르통 EC 산업 담당 집행위원 역시 “(IT 업체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을 경우 더 엄격한 규칙과 처벌을 적용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외신은 EU의 공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데이터 보호 등 이슈에서 EU가 그간 미국보다 훨씬 공격적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디지털세 부과도 지지했던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C 부위원장은 미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우선 규제를 택하는 게 유럽식 접근법”이라고 설명했다. EU 규제의 얼개는 19일 공개 예정인 AI 데이터 수집 범위 등에 관한 정책 초안에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U의 서슬이 퍼렇다 보니 저커버그도 일단 꼬리를 내렸다. 그는 이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거대 IT 기업에 더 많은 규제가 필요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기업이 실수를 저지르면 책임을 지게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제목만 보면 규제 필요성은 인정하겠다는 건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다른 속내가 엿보인다. 기업의 자율규제 능력을 강조하되, 모든 책임을 IT 업체가 떠안지 않겠다는 단계적 전략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앨리나 폴리아코바 유럽정책분석센터 CEO는 “(저커버그가) EU와 정면 대결을 하기보다 토론의 장 안에 들어가 활동하는 편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고 풀이했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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