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정 런던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어야 ‘식품한류’죠”
“식품한류가 별 것인가요. 마트나 편의점 등 언제 어디서든 빠르게 구입해서, 간단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어야 글로벌 식품이죠. 라면이나 고추장처럼요.”
영국에서 매년 10월이면 한국을 넘어 아시아 영화를 전파하고 있는 전혜정(52) 런던아시아영화제(LEAFF) 집행위원장은 요새 한국 식품문화를 알리는 전도사가 됐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때문이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15일 만난 전 위원장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상기돼 있었다. 그는 휴대폰으로 기생충을 상영하는 영국 내 1,550여개 상영관(스크린수)이 나열된 목록을 보여주며 “한국영화가 이렇게 많은 극장에서 개봉하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7일 기생충 개봉 당일 런던 시내 일부 극장에선 티켓 매진 사례가 이어졌다”며 영국에서 부는 기생충 열풍을 생생하게 전했다. 영국은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상 등 주요 부문을 싹쓸이 하자, 더욱 흥분 속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영화 속에 나왔던 일명 ‘짜파구리(람동, 라면+우동)’를 비롯해 소주, 맥주 등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식품도 상종가를 쳤다. 최근 전 위원장이 그 어느 때보다 바빠진 이유다. 기생충 개봉 전 유료 시사회에서 농심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한데 묶어 ‘짜파구리 세트’를 기획한 게 바로 전 위원장이다(본지 14일자 ‘짜파구리, 뉴욕 고급 레스토랑에 메뉴로 떴다’). 농심에서 보내 온 기생충 패러디 포스터 뒷면에 짜파구리 조리법을 담고, 기생충이 상영되는 상영관에서 30초짜리 농심의 글로벌 광고 상영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시사회를 했던 ‘프린스 찰스 시네마’ 극장은 ‘LEAFF’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짜파구리 기프팅 프리뷰’ 행사를 흔쾌히 허락해줬어요. 기생충은 이미 2일 제73회 영국 아카데이 시상식에서 각본상과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지지를 먼저 받은 셈이죠.”
전 위원장과 농심의 인연은 지난해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 위원장은 그 해 4월 영국국립미술관에서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을 상영하면서 “한국의 식품도 같이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농심의 문을 두드렸다.
“영국국립미술관에서 영화 상영을, 그것도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행사에 참여한 젊은 영화팬들에게 한국 역사와 식품을 같이 알리는 게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팝콘 대신 새우깡을 소개하면 어떠하겠느냐고 먼저 제안했는데, 농심 측에서 무척 흥미로워하며 협업이 진행됐어요.”
이어 9월에는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봉 감독의 영화 ‘괴물’을 템즈강 보트 위에서 상영한 바 있다. 이때도 전 위원장은 ‘신라면’과 함께 ‘진로’ 소주를 시식하는 시간을 마련해 영국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영국 영화계 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영화협회(BFI)’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많은 지원금을 받고 있고, 아시아영화제도 세계를 무대로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다. 그는 2006년 런던 한국문화원이 출범할 때 초창기 멤버였다. 이때 런던한국영화제를 만들었고, 문화원을 나온 뒤 LEAFF로 발전시켰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한국 식품을 알리는 일에 반영되고 있다. 짜파구리 행사는 이번 주말 영국 캠브리지와 셰필드 대학 인근의 극장에서도 진행한다. 그는 “셰필드 대학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아시아학과가 있는데, 그곳 학생들은 아시아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서는 등 적극적이라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 외에도 하이트진로와도 손잡고 한국의 주류문화를 알리는 데 발벗고 나섰다. 내달 8일까지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자몽, 청포도 등 4가지 과일맛이 함유된 소주를 소개하는 시식행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봉 감독은 괴물에 이어 기생충에도 소주를 기울이는 장면을 넣어 소주 역시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그래서 300여가지 식물이 있는 정원 콘셉트의 레스토랑을 섭외하는 일도 손수 했다. “자연친화적인 영국인들이 초록색병 소주를 연상할 때 푸른 정원을 떠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영국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이나 노하우가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다.
“기생충이나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 등의 활약을 보면서 K컬처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문화의 힘은 그래서 대단하고요. 영국에서 기생충을 계기로 한국의 영화와 문화가 더 번져나갈 수 있도록 앞장서려고 합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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