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스위스의 중립국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스위스 암호장비업체 크립토AG를 이용해 70년 가까이 세계 120개국의 기밀정보를 불법 수집한 ‘크립토 스파이 스캔들’의 여파다. 특히 스위스 정부와 의회 주요 인사들의 묵인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후폭풍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스위스 일간 노이에취르허차이퉁(NZZ) 등 현지언론은 16일(현지시간) “카린 켈러주터 법무장관이 지난해 12월 연방정부에 제출한 문건에 따르면 1990년대 당시 일부 장관들과 연방의원들이 크립토AG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외신들은 미 CIA와 과거 서독 정보기관 BND가 협력해 비밀리에 크립토AG를 운영하며 동맹국들의 기밀까지 무차별적으로 빼냈다고 폭로했다. 특히 켈러주터 장관의 제출 문건 중에는 당시 행정부ㆍ의회 고위인사들이 크립토AG 측으로부터 첩보활동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은 사실도 명기돼 있다.
스위스 정부는 11일 CIA와 BND가 크립토AG를 통해 동맹국을 포함한 120개국의 기밀을 탈취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즉각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자국 내에서 벌어진 CIA 첩보 행위에 눈감았다는 비판은 일파만파 커져가는 모양새다. 스위스 내부에선 특히 중립국으로서의 입지가 위태롭다는 우려가 크다. 안보는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립을 앞세워 발전해온 만큼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으면 금융업과 같은 핵심산업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온라인매체 스위스인포는 ‘중립국 스위스가 산산조각 났다’는 기사에서 “중립성은 물론 신뢰성, 심지어 주권에도 타격을 입힌 사건”이라고 비판한 뒤 “사태 해결의 관건은 철저한 조사와 투명성”이라고 강조했다.
외부의 비판도 날카롭다. 영국 BBC방송은 “(미국과의) 협력과 중립은 공존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스위스의 중립(기조)에 대해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중립을 미화하는 데만 집중하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라고 꼬집었다. 겉으로는 중립을 말하면서도 사실상 CIA의 첩보활동을 수수방관했다는 비난이다.
스위스 정부는 이번 ‘크립토 스파이 스캔들’ 의혹에 대한 조사를 오는 6월까지 마무리하고 종합보고서를 발표할 계획이다. 하지만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담기는가와는 무관하게 국제사회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예상이 많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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