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에게 맞고 자랐어요. 빗자루로 엉덩이를 세게 맞았어요. 예닐곱 살 땐 아버지가 제 옷 안에 손을 넣어 가슴을 주무르기도 했어요. 싫었지만 싫다고 하지 못했어요. 엄마와 언니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어느 날 이모가 “우리 앞에서 그러지 마라”고 한 뒤 ‘남이 보기에도 좀 그런 일이구나’ 싶어 엄마에게 싫다고 얘기했어요. 그 뒤 아빠가 저를 만지지 않았지만 아빠가 저를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아빠는 네가 귀여워서 그러는 거지”라고 가족들은 대충 얼버무리셨어요.
엄마는 감정 기복이 컸어요. 그래서 항상 엄마 눈치를 봤어요. 초등학교 때 친구 때문에 힘들다고 했을 때 엄마는 “언니들만 해도 그런데 너까지 왜 나를 힘들게 하니”라며 짜증을 냈습니다. 힘든 얘기를 싫어해서 엄마에게는 밝은 얘기만 했어요. 중학교 때 둘째 언니가 조현병 진단을 받은 뒤로는 저는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외롭고 힘들게 지냈습니다. 제 뜻보다 부모의 뜻에 맞췄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가 누군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조용히 있어야 가족을 돕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미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큰언니가 미대 다니느라 돈을 다 써서 너까지 미술을 가르칠 돈은 없다”고 하셨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걸 엄마가 하게 해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큰언니는 “너는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뭐가 힘드냐”고만 합니다.
그래선지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게 너무 힘듭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앞에서 덜덜 떨면서 리코더를 불었는데, 선생님이 극복해야 한다며 한달 동안 친구들 앞에서 리코더를 시켰습니다.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어렵습니다. 이제라도 고치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상담을 받고 있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취직해서 직장 생활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사람들을 만나는 게 꺼려집니다.
박혜림(가명ㆍ24ㆍ취업준비생)
혜림씨, 당신이 지금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불안 증상이에요.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닌데도 대인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쉽게 불안해지는 증상을 겪고 있어요. 그 불안이 당신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있어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일상의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행복은 주관적이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요. 좋은 머리가 없어도, 명성과 부가 없어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주변 사람과 잘 지내고 마음 편안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제 견해입니다. 혜림씨는 불안하고 대인관계가 불편하니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더군다나 대인관계는 애매하고 복잡한 과정이라 원만한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지요.
원만한 대인관계 능력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재미있고 좋았다는 경험 속에서 자라납니다. 생애 처음 만난 다른 사람인 엄마가 반갑고 좋아야 그렇게 됩니다. 엄마가 내 요구를 편안하게 해결해 준 경험, 혹은 요구를 들어주지는 못했어도 섭섭한 마음을 위로해 준 경험 등이 원만한 대인관계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당신의 사연 속의 기억을 살펴보면 혜림씨는 이러한 경험이 없었던 것 같아요. 느닷없이 가슴을 만지는 아버지로부터 보호해달라는 요구를 가벼운 일로 치부해버렸고 오히려 예뻐서 그런다고도 했지요. 어린아이였을 혜림씨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웠을까요. 과연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기나 한 것일까요.
배우고 싶다는 것도 거절을 했지요. 물론 경제적 사정에 따라 들어주지 못 할 때도 있지요. 못 들어주는 부모는 마음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에겐 그렇게 다친 마음을 위로받고 다시 마음의 힘을 얻는 경험이 중요하지요. 이런 경험이 없으면 아이는 결국 다른 사람을 꺼리게 되지요. 혜림씨는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필요한 도움이나 정당한 요구를 하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명랑한 척 지내는 것이 더 편한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지요.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성격 형성에 뚜렷하게 영향을 미치는 두려움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물리적 힘에 대한 공포이지요. 공포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편안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혜림씨의 아버지는 혜림씨의 옳지 못한 행동을 고쳐주기 위해서 체벌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혜림씨의 기억은 물리적 힘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것이었지요. 성적, 신체적 학대를 경험했지요. 아버지는 혜림씨의 두려움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공감하지 못했고 보호받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했지요.
이제 와서 부모를 원망하고 모든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혜림씨가 어린 시절부터 이처럼 부모와의 감정 연결이 차단된 채 지냈으며 부모로부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반기게 되는지를 배우지 못했으니 마음이 불안하고 대인관계가 편하지 않은 현재의 어려움이 당연히 이해가 된다는 거지요.
억울한 마음도 들 겁니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의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형성됐으며 어른이 됐을 때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경험을 토대로 대인관계를 맺고 문제를 처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 경험이 현재의 괴로움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어릴 때의 경험이 지금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으나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부모를 원망하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안겨준 부정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고 건강하게 대응하는 걸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혜림씨. 아버지는 더 이상 당신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못해요. 당신의 어머니도 당신을 함부로 대하진 못합니다. 당신은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하셨어요. 그건 당신의 마음에 힘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요. 당신이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상담을 받고 있는 것 또한 당신이 건강하게 잘 나아갈 힘이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부모로부터 이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얘기는 비교적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 당신이 현장에서 유능감을 경험했으면 한다는 거에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 불안감이 조금씩 줄어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어서 불안 증상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달라요.
아는 것은 인지 능력이고, 불안은 정서적인 거예요. ‘내가 저 사람 앞에서 떨릴 이유가 없는데 다음에 저 사람을 만나면 좀 덜 떨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 즉 인지영역인데, 그런데도 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것은 마음, 즉 정서 영역의 문제예요. 이 정서 영역 중 불안을 완화해야 해요. 아주 작은 일부터 중요한 일에 있어서까지 ‘아 지난번보다는 좀 괜찮아졌구나’라는 유능감을 스스로 경험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해요.
지금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때 쉽게 불안해지는데, 높아진 불안 증상에 압도돼 당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안이라는 불을 끄느라 모든 것을 다 쏟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다음 단계로 조금씩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하고 있는 상담과 함께 전문의와 상의 후 약물 치료를 병행하시기를 권합니다.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지만, 불안으로 인한 증상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혜림씨, 성숙이란 불안과 모호함을 견디어내는 내면의 힘을 쌓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리 확실하고 명확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보편적이고 선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말은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공포감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편하게 말하고 행동해도 다른 사람이 당신을 반길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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