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가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을 해 다른 후보들과 나눠가지고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지난 9일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감독상 수상 소감을 밝혔을 때 객석엔 웃음과 박수가 넘쳤다. 텍사스 전기톱은 유명한 공포영화 시리즈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 사건’에서 착안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 빗댄 기발한 수상 소감에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박장대소할 만했다. 영화광인 봉 감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봉 감독은 이날 수상 소감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헌사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영화공부 할 때 가슴에 새긴 말이 있는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이라며 ‘위대한 마틴 스코세이지가 한 말”이라고 밝혔다. 수상식 이후 스코세이지의 딸이 “오스카 수상보다 더 기뻤다”고 할 정도로 거장을 감동시킨 소감이었다. 봉 감독은 수상자 공식 기자회견에서 “스코세이지는 예전부터 좋아했던 감독인데, 그가 아카데미상 후보에만 오르고 번번히 수상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답답했었다”며 “(2007년) 스코세이지가 ‘디파티드’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 오스카를 수상할 때 환호성을 질렀다”고도 했다.
봉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아시아 영화 감독으로 “한국 영화의 거장 김기영, 감독과 대만 후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꼽았다. 미국 영화전문 매체 인디와이어는 지난 6일 봉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 30편을 소개했는데, 이중 봉 감독이 수상 소감과 기자회견 발언으로 언급한 감독의 작품을 소개한다.
◇‘성난 황소’(1980ㆍ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실존 유명 복싱선수 제이크 라모타(로버트 드니로)의 굴곡 많은 삶을 그린 영화다. 복싱에는 재능을 지녔으나, 링 밖 인간관계는 서툴렀던 라모타가 중년이 돼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드니로는 어린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의 프로모터인 형과 부인의 관계를 의심하는 등 불안증에 시달리는 라모타를 거칠고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 낸다. 드니로가 중년이 돼 체중이 불은 라모타를 연기하기 위해 몸무게 23㎏을 불린 사연은 유명하다. 흑백화면이 삶의 비정을 건조하면서도 차분하게 전한다. 1980년작. 마동석 주연의 동명 한국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니 혼동하지 마시길.
◇‘하녀’(1960ㆍ감독 김기영)
‘충무로 기인’ 김기영(1919~1998)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중산층 가정에 가정부가 입주하면서 벌어지는 치정극을 통해 당대의 계급 갈등 등을 보여주는 스릴러다. 아내, 두 자녀와 함께 이층집에 거주하는 피아노 강사 동식(김진규)은 새로 입주한 가정부(이은심)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집안은 공포의 공간으로 변한다. 동식과 관계를 맺은 후 버림 받았다 생각하는 가정부는 아이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 일층과 이층이라는 공간을 통해 계급을 상징하고, 담배연기를 손에 잡으려는 장면 등을 통해 덧없는 욕망을 표현하는 연출법이 상당히 세련됐다. 2010년 임상수 감독, 전도연 이정재 주연의 동명 영화로 리메이크됐다.
◇‘이어도’(1977ㆍ감독 김기영)
제주도 뱃사람들이 죽으면 가게 된다는 전설의 섬 이어도를 소재로 했다. 서울 관광회사의 기획부장인 주인공 선우현(김정철)이 업무를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가 작은 섬 파랑도에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기이한 일들을 그렸다. 무속신앙과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파랑도의 모습을 통해 한국 사회의 이면을 들춘다. 토속성에 깃든 미스터리를 다루며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신비로운 얼굴 표정의 배우 이화시를 발굴한 작품으로,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영화다.
◇‘복수는 나의 것’(1979ㆍ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1970년대 일본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소재로 했다. 운전수인 가츠는 전국을 떠돌며 강도, 사기, 살인 등 각종 범죄 행각을 저지르면서 전국을 떠돈다. 그의 범죄 동기는 단순하다. 당장 쓸 돈이 필요하고, 성욕을 충족하고 싶다. 평범하고 일면 선해보이기까지 하는 가츠는 그저 눈앞의 이익과 쾌락을 탐닉하기 위해 아무 죄의식 없이 돈과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속이거나 죽인다. 영화는 가츠의 행각을 통해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현대 일본사회의 어둠을 들춘다. 카메라는 가츠의 행동, 가츠 주변인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객의 마음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다.
◇‘붉은 살의(1964ㆍ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비루한 삶을 사는 한 여인을 통해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영화다. 주인공 사다코는 불행하다. 할머니는 매춘부이였고, 술집 종업원이었던 어머니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남편과 아들이 있지만, 화목한 가정은 아니다. 아들은 남편과 전처 소생이고, 시어머니는 ‘이렇게 함께 살아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며 사다코를 타박하기 일쑤다. 사다코의 집에 어느 날 도둑이 들고, 도둑은 사다코를 범한다. 이후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사다코는 자신의 둥지를 박차고 나가려 한다.
◇‘비정성시’(1989ㆍ감독 허우샤오시엔)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대만 현대사를 조명한 영화다. 1990년대 세계 영화계를 풍미한 대만 뉴웨이브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해 국민당이 대만에 진주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한 가족의 풍파로 표현해냈다. 대륙인과 대만인이 충돌해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았던 2ㆍ28사건 등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집권시절 대만에서 한동안 언급이 금기시됐던 내용을 그려 대만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