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언 땅을 녹이고 희망과 기대가 움트는 계절, 긴 겨울 찌뿌둥한 근육을 삽질과 호미질로 일깨우는 계절. 봄은 도시보다 시골이 가깝다. 사진은 노루귀. 최흥수 기자

“2월 말경에 된장을 담글 거예요. 올해도 함께 해야죠?”

“예, 그럴게요. 한 말 정도 할까 봐요.”

“장독이 더 있어야겠어요. 다른 사람도 몇 명 합류하고 싶어 하니.”

“장독이라면 살 필요 없어요. 농막에 노는 애가 몇 개 있으니까 그거 가져다 써요.”

“오, 잘됐네요. 그러잖아도 독 값이 비싸 걱정했는데.”

K는 은퇴 후 내려와 살 목적으로 이태 전 우리 옆 동네에 작은 집을 짓고 지금은 주말마다 내려와 텃밭을 가꾸고 주변을 정리하며 지낸다. 지난해부터는 직접 장도 담그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아파트라 마당이 없다는 핑계로 나도 슬쩍 끼어들었다. 늙수그레한 도시 남정네들이 하는 일이라 모든 게 어설프기만 하지만 의외로 재미는 쏠쏠하다.

세컨하우스까지는 아니라도 나도 K처럼 주말마다 가는 곳이 있다. 경기도 가평에 맹지를 구해 농막을 짓고 텃밭을 시작한 지가 벌써 5년이다. 2월 말이면 어차피 농사 준비에 들어가기에 겸사겸사 K와 약속을 잡아 장독을 가지러 가기로 했다. 마늘, 양파를 심고, 11월 말 겨울 상추, 시금치용 비닐 터널을 만들어 주고 한해 농사를 마쳤으니 거의 3개월 만이다.

올해는 겨울이 따뜻한 덕에 농막과 텃밭 주변은 벌써부터 봄기운이 완연하다. 지난해 이맘때는 텃밭에 눈과 얼음이 두터웠건만 벌써 매화나무에 꽃눈이 통통하게 오르고 여기저기 꽃다지, 쑥, 지칭개 새싹들도 고개를 내밀었다. 보라색 잎의 이른 냉이도 이따금 눈에 띄었다. 저 잎이 파랗게 변할 때쯤 감자를 심고 그럼 올해의 농사도 막이 오르게 된다. 일주일 내내 몸으로 일하는 사람은 하루쯤 머리를 쓰고 머리 쓰는 일을 하면 이따금 땀을 흘려야 한다는 누군가의 충고를 듣고 시작한 농사일이다. 지금은 텃밭이 반려동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늘 관심을 주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작물은 말라 죽고 텃밭은 유기견처럼 야생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지만 아무리 바빠도 주말을 거르지 못하는 이유다.

K가 적당한 크기의 독을 골라 차에 싣는 동안 난 돌아다니며 손볼 곳이 있나 살펴보았다. 매년 2월마다 의식처럼 하는 일이다. 문패를 새로 달고 캐노피 천막 창고에 앵글을 짜 넣어 활용도를 높여야겠다. 농막 외벽에 흰색 페인트를 새로 칠해야 할까? 올해는 고추를 조금 더 심을 참이다. 매번 실패만 하는 오이, 호박 재배 방법도 다시 공부해야겠다. 전문 농군이 될 생각은 없지만 힘을 쓰지 못하는 작물이 생기면 속도 상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하긴 일주일에 한 번 오면서 욕심을 내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그저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 거두고 자족할 수밖에.

가벼운 점심 식사와 산책을 마친 후, K와 데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된장 담그는 얘기를 이어 갔다. 대나무, 숯은 구했어요? 예, 동네에 담그는 사람이 많아 서울보다 구하기가 쉬워요. 메주는 어떻게 하죠? 한꺼번에 구입하나요? 아니면 따로따로? 각자 구입하는 게 좋겠어요. 작년에 해 보니까 이것저것 섞는 것도 괜찮더라고요. 메주까지 빚을 수준은 못 되기에 올해도 지난해처럼 좋은 물건을 구해 사용하기로 했다.

추위가 가시기 전 장을 담그면 진달래꽃이 만개할 즈음에 된장과 간장을 가른다. 진달래꽃 피는 4월이면 대한민국은 제일 아름다워진다. 거리는 벚꽃이 상춘객을 유혹하고 깊은 산 북사면 계곡은 작고 여린 봄꽃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조금 전 산책 다녀온 개울도 그때쯤 돌단풍과 산철쭉으로 가득 덮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기다리는 계절도 봄이다. 겨우내 언 땅을 녹이고 희망과 기대가 움트는 계절, 긴 겨울 찌뿌둥한 근육을 삽질과 호미질로 일깨우는 계절. 봄은 도시보다 시골이 가깝다. 어디선가 직박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온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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