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국면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정치 데뷔 20일 만에 퇴장한 건 현실 정치에 대한 내공 부족이 큰 원인이지만 어설픈 ‘서민 흉내’도 영향을 미쳤다. 지하철 승차권 발매기에 1만원권 지폐 2장을 한꺼번에 넣는가 하면, 편의점에서 프랑스 생수를 꺼냈다가 당황한 보좌진에 의해 국산 생수로 교체하는 영상이 퍼져 논란이 일었다. 충북 음성 꽃동네를 방문했을 땐 환자가 해야 할 ‘턱받이’를 자신이 해 질타가 쏟아졌다. 몸에 맞지 않는 ‘서민 행보’가 ‘서민 코스프레’라는 역풍으로 돌아온 셈이다.
□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이 꼭 하는 게 서민 행세다. 버스, 지하철을 타고 재래시장 골목을 누비며 서민들의 음식을 먹는다. 소탈한 이미지를 내세우려는 것이지만 평소 하지 않던 일이라 사달이 자주 난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시장에서 상인이 건넨 흙 묻은 오이를 털지도 않고 먹어 “진짜 서민들은 오이를 씻어 먹는다”는 일침을 받았다. 정몽준 전 의원은 과거 전당대회 경선 토론에서 1,000원인 시내버스 요금을 70원이라고 해서 망신을 샀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빈번하게 시장을 다녔지만 취재진이 카메라 잡을 때만 숟가락을 들 뿐 음식에는 입을 대지 않아 뒷말을 남겼다.
□ 4ㆍ15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이런 풍경이 재연되고 있다. 5ㆍ18을 ‘무슨 사태’라고 표현해 논란이 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실수 연발이다. 지난 9일 모교인 성균관대 주변 상점을 찾았는데 떡볶이 떡을 찍어 먹는 나무 꼬치를 젓가락으로 사용하고, 어묵 먹는 방법도 몰라 주인에게 “이건 어떻게 먹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이낙연 전 총리도 지난달 24일 첫 지역구 일정을 위해 지하철을 탔다가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갖다 대 빠져 나오는 데 어려움을 겪은 모습이 구설에 올랐다. 이 전 총리는 지난 1일에도 지하철 이용 사진을 공개했는데 이번에는 다리를 꼬고 앉아 논란이 됐다.
□ 수행원이 온갖 수발을 들어주는 고위 공직을 오래하다 보면 서민들 삶과 동떨어지기 쉽다. 한 전직 3선 의원은 “버스도 혼자 못 타는 바보가 돼 있더라. 얼마나 무능한 생활인이 됐는지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힘겨운 삶을 사는 서민들을 걱정한다면 평소 혼자 시장도 가보고 골목길도 걸어봐야 한다. 진정성 없는 서민 흉내는 그만둘 때도 됐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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