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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아는 엄마 기자]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재난 연구는 지지부진… 국민이 믿을 건 마스크뿐

입력
2020.02.15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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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지난 주말 외출을 미루고 집에서 영화 ‘백두산’을 봤다. 영화 속 화산 폭발은 배우들의 열연과 긴박한 전개 덕에 예상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킬 백두산 지하 마그마방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땅굴로 핵무기를 집어넣어 구멍을 낸다는 영화의 설정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공상에 가깝다. 하지만 첫 폭발 이후 내내 흙빛으로 뒤덮여 있는 남북한의 모습은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근거가 있다. 만약 백두산이 정말 대규모로 폭발한다면 그때 분출되는 화산재가 남북한 전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 대해선 많은 과학자들이 동의한다. 백두산에서 날아간 화산재가 한반도 상공에 떠 있을 수년간 우리나라에선 햇빛을 보기 힘들어질 지 모른다는 예상도 있다.

영화 백두산이 보여 준 재난이 우리에겐 아직 상상 속 장면이지만, 이미 현실로 경험한 나라도 적지 않다. 지난달엔 필리핀 수도 마닐라 남쪽에 있는 탈 화산이 폭발해 인근 주민과 관광객 수천명이 대피했다. 이후 추가 폭발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현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화산재에 대응하는 방법이 빠르게 퍼졌다. 화산재와의 접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되도록 실내에 머물고, 불가피하게 외출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화산재가 많이 날릴 땐 마스크가 없으면 숨 쉬기조차 힘들다는 경험담도 줄을 이었다.

그러자 마닐라를 중심으로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나며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평소 600원 안팎에 팔리던 보건용(N95) 마스크값이 4,500원 수준까지 올랐다. 결국 필리핀 당국은 유통업계 단속에 나섰고, 급기야 유엔(UN)에 마스크 지원까지 요청했다. 화산 폭발에 따른 용암이나 지진 피해가 단기적이고 지역적인 데 비해 화산재의 영향은 장기적이고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입증된 것이다.

필리핀의 마스크 품귀 현상은 오래지 않아 아시아 전체로 확대됐다. 이번엔 신종 코로나가 마스크 가격을 끌어올렸다. 발병지인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홍콩, 마카오, 일본 등지에서도 마스크는 ‘귀한 제품’이 됐고, 심지어 미국 일부 지역에서까지 마스크를 사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화산 폭발이나 신종 전염병 확산 같은 국가적 재난에 일반 국민들이 대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고작 마스크 구입밖에 없나 싶다.

화산 폭발이나 바이러스 진화를 사람의 힘으로 원천 차단할 길은 없을 터다. 하지만 적어도 위험이 커지는 시기나 장소, 위험의 정도 등을 예측하는 건 과학의 힘을 빌어 가능하다. 예측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대비도 가능해질 것이다. 마스크에만 의존하지 않고 재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체계를 갖추려면 반드시 과학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중국 후베이성 우한중심병원에서 화난수산물도매시장과 관련된 환자 여러 명이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 걸 알게 된 의사 리원량씨는 SNS를 통해 이 병이 확산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일 먼저 경고했다. 중국 당국은 이를 허위 정보라 단정 짓고 민심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리씨를 탄압했다. 결국 신종 코로나는 그의 경고대로 일파만파 확산됐다. 중국이 정치적 판단으로 과학자의 ‘입’을 막은 결과다. 심지어 중국 당국이 공식 발표보다 먼저 사람 간 감염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던 정황을 보여 주는 연구논문이 최근 알려지기도 했다.

백두산 연구 필요성은 과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백두산의 지리적 위치를 감안하면 남북한은 물론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다. 그러나 공동 연구는 늘 ‘외풍’에 시달렸다. 남북 또는 한·중 관계가 경색될 때 연구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남북 정상회담 같은 훈풍이 불면 그제야 불씨가 되살아나곤 했다. 폭발 위험을 예측하려면 꾸준한 관측 데이터 확보가 핵심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에 따라 연구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데이터를 얻기는 쉽지 않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찾아보지만, ‘일시 품절’ 문구만 계속 뜬다. 운 좋게 구매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해도 금세 자동 취소되기 일쑤다. 전염병 재난 중에 가족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클릭’뿐이라는 게 참 답답하다. 정치가 과학을 막는 일이 반복된다면 미래 세대의 세상에서도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마스크뿐일지 모른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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