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 우려에 전년대비 17% 감소
전국 혈액보유량 ‘주의’ 임박
한시 급한 혈액 환자들엔 치명
“병원에 혈액이 부족해 수혈을 받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제발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세요.”
유치원 교사 김희진(29)씨는 지난 9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정헌혈’을 부탁하는 글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혈액보유량이 부족해지자 혈액암으로 1년째 투병 중인 어머니 주관월(55)씨의 수혈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혈액암의 한 종류인 혈관면역모세포형 T세포 림프종(AITL)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이어온 주씨는 차도가 없어 이달 5일 신약 임상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임상치료가 가능한 혈소판 최소 수치는 5만 마이크로리터(μlㆍ100만분의 1리터당 혈소판 개수)인데 주씨의 현재 혈소판 수치는 5,000μl에 불과하다. 매일 2회 이상 수혈을 받아 혈소판 수치를 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로 헌혈량이 급감하면서 하루 1회 수혈도 어려워졌다. 며칠 전엔 주씨가 입원 중인 서울삼성병원에 AB형 팩이 하루에 단 한 개만 들어왔다는 얘기도 들렸다. 가뜩이나 주씨 같은 AB형은 혈액 보유량이 적은데다 겨울은 출혈 환자가 많은 시기라 대기 순번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주씨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며칠 전부터는 식사도 못할 정도로 구토를 했고 비장에 방사선 치료까지 받고 있다. 딸 김씨는 “임상치료 동의 후 한 달 안에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대상에서 제외된다”며 흐느꼈다.
신종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며 평소에도 혈액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혈액암 환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12일 의료계에 따르면 급성백혈병과 재생불량성 빈혈 등 혈액 생성 관련 질병이나 오랜 항암 치료로 혈액을 만드는 조혈 기능이 떨어진 암 환자는 다른 암 환자보다 수혈량이 많다. 평소엔 친척이나 지인에게 헌혈증서를 부탁하는 임시방편으로 수혈량 부족을 해결하지만 신종 코로나로 혈액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 됐다. 신종 코로나는 혈액이 아닌 비말(침방울) 감염으로 알려졌어도 헌혈 도중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헌혈자가 급감한 탓이다.
현장에서도 ‘헌혈 한파’를 호소하고 있다. 이날 오후 찾아간 서울 종로구 ‘헌혈의 집 대학로센터’ 헌혈자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간호사 이솔(33)씨는 “안 그래도 방학에는 헌혈자가 적은데 신종 코로나 이후엔 하루 평균 헌혈이 50건에서 20건으로 뚝 떨어졌다”며 “간호사들이 2인 1조로 직접 나가 헌혈을 독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 국내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11일까지 헌혈 건수는 총 13만3,269건으로, 지난해 동기(16만952건) 대비 17% 감소했다. 전체 헌혈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던 단체 헌혈은 지난달 28일 이후 무려 273건이 취소됐다. 헌혈이 무산된 인원은 1만3,916명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자 이날 0시 기준 전국 평균 혈액보유량은 3.5일분(1만9,806유닛)까지 내려갔다. 현 추세면 이번 주중에 보유량이 3일분 미만인 ‘주의’ 단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수혈이 다급한 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불특정 다수의 지정헌혈을 부탁하는 글을 올린 뒤 타인의 선행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지정헌혈 온라인 플랫폼 ‘피플’에서도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지정헌혈 요청 건수가 하루 평균 1건에서 5건으로 늘었다. 김범준 피플 대표는 “평소에도 혈액암 환자들의 요청이 전체 지정헌혈 요청의 70%에 이를 정도인데, 신종 코로나로 사태가 악화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악성 림프종 환자의 보호자는 “여동생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병원에서는 O형 혈액보유량이 부족하니 지정헌혈을 부탁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며 “그렇게 했지만 아직까지는 도움이 거의 없어 막막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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