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ㆍZDF “120개국에 암호장비 팔아 70년 첩보활동”
미국 정보기관 중앙정보국(CIA)이 비밀리에 소유한 암호장비 회사를 내세워 70년 가까이 세계 각국의 기밀 정보를 빼낸 것으로 드러났다. 장비를 판 나라만 무려 120개국에 달해 지금까지 불법 수집한 기밀 정보의 양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우리나라도 물론 포함됐다.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스파이 혐의를 씌워 맹비난을 퍼붓던 장본인이 동맹의 속사정까지 무차별적으로 염탐한 셈이라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와 독일 공영방송 ZDF는 공동 탐사취재를 통해 입수한 CIA 기밀 보고서를 근거로 스위스 암호장비 회사 ‘크립토AG’의 실소유주가 CIA였다고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크립토AG는 통신 내용을 암호화하는 장비를 제작ㆍ판매하는 업체로 1990년대말 이후 암호기술이 다각도로 발전하기 전까지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유지했다. 약 120개국이 크립토AG 장비를 자국 정보기관, 외교관, 군 등에 도입해 활용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독일 통일 전 서독 정보기관 BND와 함께 크립토AG 지분을 나눠 소유하고 1940년대부터 긴밀히 협력했다. ‘루비콘’이라는 작전명 아래 판매 장비를 조작한 뒤 특정 국가의 암호화된 통신 내용을 두 기관이 해독할 수 있게 만드는 식이었다. 이렇게 탈취한 정보는 미국과 서독의 각종 외교정책에 적극 반영됐다. 장비 판매로 얻은 수백만달러의 수익도 사이 좋게 나눠 가졌다.
대표적으로 1979년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사태 당시 미국은 이란 이슬람율법학자들을 크립토AG로 감시하면서 대응 전략을 세웠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간 포클랜드 전쟁 때는 아르헨티나의 군사작전 정보를 같은 수법으로 빼내 영국에 제공했다.
1980년대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인도, 파키스탄 등 정치적으로 낙후된 아시아 국가들이 주된 표적이 됐다. 한국 역시 거래 대상이었다. 1981년 통계를 보면 한국은 회사 매출 10위권 안에 드는 ‘큰손’이었다. 바티칸도 고객 명단에 들어 있었다. 반면 냉전시대 구 소련과 중국, 북한 등 공산권 국가들은 장비를 도입하지 않았다. 다만 WP는 “CIA가 고객들과 이들 나라의 연락 과정을 역추적해 상당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CIA는 루비콘 작전을 두고 ‘세기의 첩보 쿠테타’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크립토AG 기술이 더는 세계 시장을 주름잡지 못하게 되자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독일 통일로 BND가 발을 뺀 후에도 BND 소유 지분을 사들인 CIA는 2018년까지 장비를 운용했다. 외신은 화웨이가 5세대(5G) 통신망 장비로 각국 기밀을 빼돌릴 수 있다고 미국이 주장한 배경에 루비콘 작전의 경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WP는 이런 상황을 ‘크립토AG의 파장’이라고 묘사했다.
스위스 정부는 즉각 폭로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진정성에 의구심을 표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독일 정보전문가 에리히 슈미트엔봄은 “크립토AG를 활용한 서방첩보 기관의 불법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며 “스위스 당국이 장비의 본질을 몰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영국 BBC방송 역시 “조작되지 않은 암호장비를 받은 유일한 나라가 스위스”라며 의혹에 힘을 실었다.
CIA와 BND는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문건 진위 여부에 대해 반박도 하지 않았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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