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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바꾼 법들] 희생자 이름 法에 새겼건만… 여전한 ‘위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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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바꾼 법들] 희생자 이름 法에 새겼건만… 여전한 ‘위험사회’

입력
2020.02.12 04:30
수정
2020.02.13 09:4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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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민식이법ㆍ하준이법ㆍ윤창호법 등 이름 딴 법안 10개 넘어

입법 위해 행동 나섰던 유족들 “원통한 죽음 헛되지 않기를”

윤창호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지만, 부모는 윤씨의 흔적을 집에서 지울 수가 없다. 지난달 18일 부산 해운대구의 윤씨 집 신발장에 윤씨가 신던 군화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윤씨의 부친 윤기현씨는 “한국군 군화와 미군 군화를 모두 뒀다. 아들이 예전처럼 집에 있는 것 같아 버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카투사로 군 복무 중이었던 윤씨는 휴가 중 친구를 만나러 외출했다가 만취 차량에 치여 숨졌다. 부산=왕태석 선임기자
윤창호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지만, 부모는 윤씨의 흔적을 집에서 지울 수가 없다. 지난달 18일 부산 해운대구의 윤씨 집 신발장에 윤씨가 신던 군화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윤씨의 부친 윤기현씨는 “한국군 군화와 미군 군화를 모두 뒀다. 아들이 예전처럼 집에 있는 것 같아 버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카투사로 군 복무 중이었던 윤씨는 휴가 중 친구를 만나러 외출했다가 만취 차량에 치여 숨졌다. 부산=왕태석 선임기자

사람이 죽었고, 그 죽음을 계기로 법이 만들어졌다. 얼마나 원통했는지 대한민국엔 희생자 이름이 붙은 법이 유독 많다. 이미 10개를 넘었다. ‘민식이법’ ‘하준이법’ ‘세림이법’ ‘태호ㆍ유찬이법’ ‘해인이법’ ‘한음이법’ 등에는 어린 생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예강이법’ ‘종현이법’ ‘재윤이법’ ‘권대희법’ 등 의료사고와 관련된 법도 적지 않다. ‘윤창호법’ ‘김용균법’ ‘임세원법’ ‘태완이법’에도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권대희(왼쪽 위부터) 김용균 윤창호씨의 생전 모습. 아래는 전예강 김태호 김재윤 최하준 이해인(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의 모습.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유족 제공. 그래픽=신동준 기자
권대희(왼쪽 위부터) 김용균 윤창호씨의 생전 모습. 아래는 전예강 김태호 김재윤 최하준 이해인(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의 모습.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유족 제공. 그래픽=신동준 기자

누군가 숨져야 법이 만들어지고, 그래야만 바뀌는 사회라면 정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죽음은 이어진다. 고인의 이름은 그래서 우리 사회에 무거운 과제를 남긴다. 한국일보는 지난달부터 연락이 닿은 희생자 8명의 유족을 한 달 동안 차례로 만났다. 해인이법, 태호ㆍ유찬이법, 윤창호법, 하준이법, 권대희법, 김용균법, 예강이법, 재윤이법을 만들어 낸 유족들이다.

고인 중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많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가 너무 좋아서 예쁜 공주를 꿈꿨던 해인이(2016년 4월 사망, 당시 4세), 언제 어디서나 ‘칭찬받는 행동’을 많이 했던 태호(2019년 5월 사망, 당시 7세), 유치원 준비물을 챙겨주지 못했다며 사과하는 엄마를 오히려 위로하던 하준이(2017년 10월 사망, 당시 4세), 항암치료를 꿋꿋이 견디며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던 재윤이(2017년 11월 사망, 당시 5세), 엄마 식사를 챙기던 살뜰한 딸 예강이(2014년 1월 사망, 당시 10세)가 그런 경우다.

지난달 29일 하준이 가족이 이사한 경기도 소재 자택 거실장에는 하준이가 평소 아끼던 장난감 로봇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채지선 기자
지난달 29일 하준이 가족이 이사한 경기도 소재 자택 거실장에는 하준이가 평소 아끼던 장난감 로봇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채지선 기자
재윤이가 타고 놀던 장난감 승용차는 재윤이의 부재로 2년 넘게 멈춰서 있다. 유족 제공
재윤이가 타고 놀던 장난감 승용차는 재윤이의 부재로 2년 넘게 멈춰서 있다. 유족 제공

소박한 목표를 이루려고,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20대 청년들도 있다. 윤창호(2018년 11월 사망, 당시 22세)씨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며 법조인을 꿈꿨다. 부산에서 만난 창호씨 부친 윤기현(54)씨는 “애가 워낙 ‘하고재비(무슨 일이든 안 하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경상도 말)’라 군대 가서도 도서관에 다니고, 휴가 땐 영어시험을 보러 다녔다”고 회상했다. 권대희(2016년 10월 사망, 당시 25세)씨는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기업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권씨 모친 이나금(60)씨는 “수술 후 심정지가 온 날 아들 통장을 봤더니, 근로장학생을 하며 번 돈이 입금돼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던 아들이었다”며 오열했다. 김용균(2018년 12월 사망, 당시 24세)씨는 경력을 쌓아 한국전력에 가고 싶어서 열악한 작업 환경을 감내하던 중이었다. 용균씨 모친 김미숙(50)씨는 “입사 후 한 달 반 정도 지나서 살이 쏙 빠져 있길래 ‘너무 힘들면 그만두라’고 했다. 그런데도 아들은 ‘조금 더 해 보겠다’며 버티다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만취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짧은 생을 마감한 윤창호씨는 2016년부터 다이어리 앞장에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문구를 직접 손으로 써왔다. 윤씨 부모는 ‘짧은’이란 말을 지우라고 말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부산=왕태석 선임기자
만취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짧은 생을 마감한 윤창호씨는 2016년부터 다이어리 앞장에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문구를 직접 손으로 써왔다. 윤씨 부모는 ‘짧은’이란 말을 지우라고 말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부산=왕태석 선임기자
고(故) 권대희씨의 모친 이나금씨가 지난달 30일 권씨의 통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권씨가 근로장학생을 해 번 돈은 2016년 9월 9일 입금됐다. 이 날은 권씨가 수술 후 의식을 잃은 날이다. 이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열심히 살았던 아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배우한 기자
고(故) 권대희씨의 모친 이나금씨가 지난달 30일 권씨의 통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권씨가 근로장학생을 해 번 돈은 2016년 9월 9일 입금됐다. 이 날은 권씨가 수술 후 의식을 잃은 날이다. 이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열심히 살았던 아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배우한 기자
2018년 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김용균씨의 유품이 한 곳에 모아져 있다. 하청업체 로고가 찍힌 작업복과 여러 종류의 컵라면을 보면 김씨의 고된 직장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과자와 수첩, 휴대폰 충전기와 세면도구도 놓여 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ㆍ한국일보 자료사진
2018년 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김용균씨의 유품이 한 곳에 모아져 있다. 하청업체 로고가 찍힌 작업복과 여러 종류의 컵라면을 보면 김씨의 고된 직장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과자와 수첩, 휴대폰 충전기와 세면도구도 놓여 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ㆍ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들의 아들과 딸은 이미 숨을 거뒀다. 법이 생긴다고 세상을 떠난 자식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남은 가족들이 받는 혜택도 딱히 없다. 그러나 유족들은 저마다 행동에 나섰다. 이어지는 죽음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피해자 입장에 서 보니 고통이 너무나 커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죽음 이후 세상이 바뀌길 바랐지만 실제로는 그에 한참 못 미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대한민국은 현재 여전히 안전하지 않고 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지도 않았다. 피해자와 약자를 지켜 주고 보듬어 주는 사회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하준이 엄마인 고유미(38)씨는 “누군가는 어두운 곳에 가로등을 켜야 하기에 유가족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대책은 ‘아래에서 위’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마련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미숙씨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유가족이 나서지 않아도 가해자 처벌과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유족들은 특히 “불행한 사고는 누구한테든 일어날 수 있다”며 우리 사회가 고인의 죽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해인이는 어린이집에 갔다가, 태호는 축구클럽에 들렀다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준이는 주말 나들이 장소였던 놀이동산 주차장에서 변을 당했다. 예강이는 코피가 멈추지 않아 대학병원을 찾았다가, 재윤이는 감기 증세로 병원에 들렀다 숨졌다. 군인이었던 윤창호씨는 휴가를 나와 가족과의 식사 후 친구를 만나러 잠깐 외출했다가, 김용균씨는 여느 때처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중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권대희씨는 평소 콤플렉스였던 턱을 수술하려고 ‘14년 무사고’ 광고를 낸 병원을 방문했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윤창호씨는 평소 “세상에 온 뜻이 있을 텐데, 그저 그렇게 살다 가는 건 아닌 것 같아”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권대희씨는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에 ‘세상에 내 이름으로 된 흔적 남기기’란 말을 적었다. 유족들은 고인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마음 속 깊이 멍이 생긴다. 하지만 이 죽음을 계기로 안전한 사회가 구축되고, 약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계속해서 불리고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며 죽음을 기억해 달라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희생자들의 사진과 유품을 실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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