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여름까지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1년간 연수 생활을 하면서 인종 차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헤드폰을 쓴 채 올라탄 지하철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백인 할머니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너의 헤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가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황급히 볼륨 버튼을 찾는 동안 이번에는 반대편 옆자리에 앉은 흑인 할머니가 나섰다. 백인 할머니에게 맞은편 좌석을 가리키며 “저 여학생이 내는 소리를 갖고 왜 엉뚱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건너편에는 이어폰도 끼지 않은 채 휴대전화의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있는 백인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계기로 중국인 혐오, 아시아인 혐오가 표면화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해 뉴욕 생활이 떠올랐다.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한 일들이었지만 ‘사회적 소수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싶은 일화가 잊혀질 때쯤이면 한 번씩 만들어지곤 했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수민족으로서 일상을 지탱해 가는 외국 교민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할지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 외신에서 자주 접하는 아시아인 차별과 혐오 관련 뉴스에 자꾸 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아시아인 혐오 관련 뉴스 중 지난달 영국 가디언에 실린 베트남계 영국인의 기고문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출근길 버스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 남성이 재빨리 자신의 짐을 챙겨 자리를 뜨는 모습을 목격했다. 주말 동안 이용한 기차에서는 맞은편에 앉은 이들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병(신종 코로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차이나타운은 가지 말아야 해”라고 말하는 황당한 상황을 맞아야 했다. 그는 칼럼에 “아마도 그들은 내가 영국 시민으로서 바이러스를 옮길 가능성이 그들보다 더 높지 않다는 생각은 하지 못 했을 것”이라며 “바이러스 확산으로 중국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드러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다양성 속에서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동아시아인을 개개인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편견을 드러냈다’는 표현에서 멈칫했다. 재난의 공포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것일 뿐 편견과 차별은 이미 우리에게 체화된 것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생각해 보면 아시아인으로서 억울하기만 해도 괜찮은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도 언제든 혐오 대상이 아닌 차별하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 주민들이 한때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온 교민 수용을 반대한 일이야 대승적 차원의 수용 결정으로 잘 마무리됐지만 얼마 전 있었던 성전환 여학생의 여대 입학이 좌절된 일도 차별과 혐오가 만들어낸 일이다. 더욱이 사회가 다변화하면서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ㆍPC)’의 새로운 사례, 새로운 소수자는 꾸준히 늘어난다. 수년 전 미국 실리콘밸리 굴지의 기업에서 근무하는 대학 후배는 업무에 들이는 노력 못지않게 팀원들을 ‘PC하게’ 대하는 일에 많은 공을 들인다고 고백했다. 동성 커플이 많은 미국 기업에서 ‘아내’나 ‘남편’이라는 말보다는 ‘파트너’라는 말이 바람직한 표현이라는 것도 그때 배웠다.
지난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본 연극 ‘앵무새 죽이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한 사람은 현명하지만 사람들은 멍청하고, 군중은 감정적으로 행동한다(A Person is smart, people are dumb, a mob acts out of emotion).’ 집단에 숨어 혐오와 차별을 일삼게 되는 군중 심리에 대한 위기감이 큰 요즘, 좀 더 예민한 감수성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인의 철옹성 같던 미국 아카데미마저 벽을 허물고 한국 영화 ‘기생충’에 무려 4개의 상을 안겨준 지금이 아닌가.
김소연 국제부 차장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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