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희롱은 남녀간 대립 문제가 아니다. ‘세대별 감수성’ 차이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 크다. 10~20살 차이 나는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0년 동안 성폭력 피해자 450여명을 무료 변론해온 천정아(41) 변호사는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미투 사건 이후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연히 달라졌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평가했다. 천 변호사는 많게는 1년에 100여명을 상담하다 보니, 피해자들이 겪었던 미세한 고통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천 변호사는 사내에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정착된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피해가 발생하면 과거에는 쉬쉬했지만, 이제는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신고하는 추세다. 회사도 사건이 접수되면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사내에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 언론에 보도될 수 있고 상급기관이나 수사기관이 나설 수도 있어 첫 단계에서 제대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각종 미투 사건 이후 ‘사내 성희롱 예방교육’이 확대되며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에서 강의요청이 늘어난 것도 인식 전환에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달라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감수성’은 여전히 세대별로 온도 차가 크다고 지적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남성인 사례가 이 같은 차이를 잘 보여준다. 천 변호사는 “세대별로 가치관과 성인지 감수성 차이가 두드러진다”며 “상사에겐 가벼운 장난이 후배에겐 심각한 성희롱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시는 자리가 빈번한 50~60대 남성 상사와 20~30대 남성 직원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장난스런 신체접촉’이 대표적 사례다. 장난이라고 여기고 신체의 특정부위를 만진 상사의 행위를 불쾌하게 생각한 부하 직원이 ‘이런 것도 성희롱이 되냐’고 상담해온 적이 있었다. 천 변호사는 “의사에 반하는 신체접촉은 당연히 성희롱이고, 행위가 심하면 강제추행에도 해당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세대간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고 천 변호사는 전했다. 20~30대는 “친한 친구 사이에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반면, 50~60대는 “남자들끼리 그게 무슨 성희롱이 되느냐”며 웃고 넘기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은 가해자와 피해자, 조사자가 같은 조직 내에 있는 탓에 피해자는 일상에서 주변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이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뒤에도 피해자는 ‘2차 피해’라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일이 다반사다. 회사에서 매일 보는 지인들 사건이라 주변의 관심이 높은 만큼 소문도 쉽게 퍼진다.
게다가 위로나 격려를 한다며 무심코 피해자에게 건넨 한두 마디가 심각한 2차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의 일이지만, ‘내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피해자의 상처를 덧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천 변호사는 “의도는 피해자를 배려하려는 취지였겠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말들이 홀로 외롭게 싸우는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며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피해자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천 변호사는 특히 피해자가 겪은 악몽과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사내 분위기가 여전하다고 전했다. “사과 받고 조용히 끝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해야겠어”, “가해자에게 그렇게 불이익이 가도록 해야 했느냐” 등의 표현이 대표적이다. “뭐 이런 일로 이렇게 분란을 만드냐”, “회사 계속 다녀야지”와 같이 피해자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신속한 사건처리를 종용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천 변호사는 “피해 사례를 제기할 때 사내 징계시효를 반드시 살피라”고 조언했다. 회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성희롱 문제에 대한 징계 시효는 대체로 3년이다. 피해자가 오랜 기간 괴로워하다가 고심 끝에 피해를 신고해도, 이미 3년이 지난 사건이라면 사내에서 문제 해결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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