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일을 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수상하며 수상 낭보에 방점을 찍었다. 감독상과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추가해 4관왕에 올랐다. 이번 수상은 작품 속 기택(송강호)의 대사처럼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제작을 맡은 곽신애 대표 역시 수상 소감을 통해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여진 기분"이라고 말했다.
10일 오전 10시(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기생충'은 최우수작품상·감독상·각본상·편집상·미술상·국제영화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매년 영화 팬들이 기다리는 행사지만 올해는 '기생충' 때문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최고상인 작품상을 수상한 뒤 무대에 오른 바른손E&A의 곽신애 대표는 "말이 안 나온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니까 너무 기쁘다. 지금 이 순간에 의미 있고 상징적이며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여진 기분이 든다"면서 "이런 결정을 해주신 아카데미 회원 분들께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이번 '기생충'의 수상은 여러 모로 큰 의미를 갖는다. 외국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건 92년 역사상 없던 일이다.
또한 아시아 영화나 영화인이 후보에 오른 경우도 손에 꼽힌다. 인도계 영국인 이스마일 머천트가 1986년 '전망 좋은 방' 이후 8번 후보에 올랐고, 이안 감독이 '와호장룡' '라이프 오브 파이'로 2001년과 2006년에 노미네이트됐다. 홍콩 출신 제작자 키트먼 호는 '7월 4일생'(1990)과 'JFK'(1992)로 올리버 스톤 감독과 함께 후보에 올랐으며, 1997년엔 '제리 맥과이어'의 리처드 사카이가 작품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지금까지 아카데미 시상식이 주목한 대부분의 감독과 제작자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영어권 국가에 살거나 할리우드 자본의 힘을 빌린 인물들이었다. 자본과 언어 등 모든 면에서 할리우드와 무관한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 건 '기생충'이 최초다.
한국영화는 지난 1962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처음 도전했지만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예비 후보에 오른 것 외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올해 '기생충'을 통해 58년 만에 처음으로 진출에 성공했고 주요 상을 모두 휩쓸었다.
시상식에 앞서 지난 8일 뉴욕타임스(NYT)의 영화평론가 카일 뷰캐너는 '기생충'이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놓고 샘 멘데스 감독의 '1917'과 경합을 펼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3년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문라이트'가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를 누르며 작품상을 수상한 일을 상기시키며 "'기생충'이 이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로는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할 경우 아카데미가 백인 위주의 시상식이라는 비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상이 외국어 영화에 작품상을 내준 건 예상 밖의 일이지만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도 조성돼 있었다. '기생충'은 지난해 5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여러 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북미 4대 비평가 협회상도 모두 휩쓸었다. 뉴욕 비평가협회상과 전미 비평가위원회상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LA 비평가협회상에선 작품상·감독상·남우조연상(송강호)을 받았다. 시카고 비평가협회상에선 작품상·감독상·각본상(봉준호, 한진원)·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남다른 위상을 입증했다. 급기야 미국의 양대 시상식 중 하나인 골든글로브에서도 외국어 영화상을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다.
늘 여유롭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던 봉준호 감독도 이변이 속출한 이번 시상식에서는 극도의 긴장감과 당혹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특히 감독상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그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연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화학도 시절 자신에 많은 영감을 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감사 인사를 건네 감동의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하 '기생충'의 해외 주요 수상 내역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제66회 시드니 국제영화제- 시드니영화상(최고상)
△제7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엑설런스 어워드(송강호)
△제44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세컨드
△제38회 벤쿠버국제영화제- 관객상
△제43회 상파울로국제영화제- 관객상-국제영화
△제13회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최우수 작품상
△제15회 유라시아 국제영화제- 감독상
△제4회 마카오국제영화제- 아시안블록버스터영화상
△제91회 전미 비평가위원회상- 외국어영화상
△제40회 보스턴 비평가협회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제3회 애틀랜타 영화비평가협회상-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제23회 할리우드 필름어워즈- 필름메이커상(봉준호)
△제9회 호주 아카데미 시상식- 아시아영화상
△제84회 뉴욕 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상
△제45회 LA 비평가 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제3회 필라델피아 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상
△제18회 워싱턴 비평가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제23회 토론토 비평가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제54회 전미 비평가협회상- 작품상, 각본상
△제40회 보스턴 비평가협회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제32회 시카고 비평가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봉준호, 한진원), 외국어영화상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제25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유수경 기자 uu8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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