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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사회] “다시 위대한 이탈리아로” 정치권 무능이 ‘파시스트의 유령’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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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사회] “다시 위대한 이탈리아로” 정치권 무능이 ‘파시스트의 유령’ 소환

입력
2020.02.11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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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4> 극우 득세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그립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20대 청년들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극우정당 동맹을 이끄는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 로이터 연합뉴스
취업난에 허덕이는 20대 청년들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극우정당 동맹을 이끄는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 로이터 연합뉴스

이탈리아 로마의 유력대학 사피엔자 대학에 재학 중인 칼로 로베르토(21)의 졸업 후 희망 직업은 차량공유업체 우버(Uber)의 운전기사다. 콜센터에서 일하거나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의향도 있다. 그는 “주변 졸업생 5명 중 3명이 취업이 안 돼 놀고 있다”며 “먹고 살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청년 실업률은 2016년 40%에서 지난해 30%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여전히 유럽연합(EU) 평균(14.5%)의 두 배, 이웃 독일(5.6%)의 6배에 육박한다. 로베르토는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고학력 친구들도 대부분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부모의 연금에 의지하는 ‘캥거루’족”이라며 “아예 일거리를 찾아 영국이나 독일로 떠난 이들도 많다”고 했다.

로베르토와 함께 있던 알베르고(23)에게 지지 정당을 물으니 반난민, 반EU를 외치는 극우정당 ‘동맹’을 지지한다고 했다. ‘청년층은 보통 진보성향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이었지만 지금은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며 “우리에겐 이탈리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제2의 무솔리니가 필요하다”고 했다.

EU의 창업주인 이탈리아가 경제난과 포퓰리즘에 휘청이고 있다. 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8위에 달하지만 국가부채가 치솟으며 ‘유럽의 시한폭탄’ 취급을 받는다. 기성정당에서 등을 돌린 이탈리아 국민은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 정당에 표를 던졌고, 극우화 경향마저 꿈틀대고 있다.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는 적대사회의 최전선에 이탈리아가 서 있다는 얘기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시당국의 관심부족으로 로마 거리에 쓰레기가 방치돼 있다. ANSA 통신 연합뉴스
재정난에 허덕이는 시당국의 관심부족으로 로마 거리에 쓰레기가 방치돼 있다. ANSA 통신 연합뉴스

 ◇“좌도 우도 필요 없다”포퓰리즘 선택 

2018년 3월 이탈리아 총선에서 이탈리아 국민은 오성운동(지지율 32.7%)을 제1당으로 만들었다. 이어 민주당(22.9%), 동맹(17.4%), 포르차(전진) 이탈리아(17.4%) 순이었다. 이 가운데 오성운동과 동맹이 손을 잡고 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연정’을 탄생시켰다. 오성운동은 이념보다 ‘기본소득 보장’ ‘국회의원 수 감소’ 등 인기영합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포퓰리즘 정당이고, 동맹은 반난민과 반유럽연합, 반페미니즘을 외치는 극우정당이다.

포퓰리즘 정당의 등장 배경에는 기성정당의 무능과 부패가 있다. 이탈리아 국민은 2008년 유럽을 덮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5년을 우파에게, 다음 5년을 좌파에게 정부를 맡겼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10년간 연평균 1% 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에 우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좌파 마테오 렌치 총리의 비리 스캔들이 연달아 터지며 이탈리아 국민은 부패에 몸서리를 쳤다.

오성운동 당원인 다닐로 발레(36)는 기자와 만나 “신자유주의가 가진 자들을 더 배부르게 하고 양극화를 부추기는 동안 기성정당은 아무 역할도 못했다”며 “우리가 포퓰리즘으로 대중을 선동한 게 아니라, 대중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몰락한 중산층과 고학력 청년층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 당원 다닐로 발레. 그는 "오성운동은 국민들의 여망에 따른 것이지 포퓰리즘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정지용 기자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 당원 다닐로 발레. 그는 "오성운동은 국민들의 여망에 따른 것이지 포퓰리즘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정지용 기자

 ◇선심성 공약 위한 재정지출 확대 ‘독’ 

하지만 오성운동도 기성정당과 차별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기자가 찾은 로마 거리 곳곳에는 쓰레기 봉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오성운동 소속 비르지니아 라지(41) 로마 시장은 쓰레기와 대중교통 등 로마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로마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 당선됐지만, 개선은커녕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텔 직원 레지나씨는 “여름에는 쓰레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쥐와 벌레까지 들끓었다”며 “그나마 지금은 개선된 수준”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정치권 발 경제위기까지 나타났다. 오성운동은 집권 직후인 2018년 10월 자신들이 공약한 ‘기초소득 보장’ ‘연금 수령 연령 하향’ 등의 선심성 공약을 시행하기 위해 재정지출 확대 계획을 밝혔다. 이에 국가 부채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이탈리아 신용등급은 ‘투기등급’ 직전 단계(Baa3ㆍ무디스)로 강등됐다. 은행의 대출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기업들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증시는 출렁였다. 오성운동은 재정 확대 규모를 줄였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유럽 경제의 뇌관으로 꼽힌다. 이 나라 국가부채 비율은 GDP 대비 132%(2조3,600억유로)로 EU회원국 중 그리스(181%)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이탈리아에 채무 위기가 닥칠 경우 유럽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고질적인 저성장ㆍ고실업 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하며 “오성운동도 다를 것 없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후퇴한 듯” 

오랜 경제 위기와 정치권의 무능함에 지친 이탈리아에는 극우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지난해 말 이탈리아 뉴스채널 'Tg La7’의 여론조사 결과 동맹의 지지율은 34%까지 치솟아 오성운동 18%를 따돌렸다. 동맹을 이끄는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은 밀려드는 무슬림 난민에 맞서 이탈리아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다.

통신회사에 근무하는 40대 마리오는 “나도 마테오 살비니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이 페라리를 사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기성정치는 부패했고, 오성운동도 실패한 이상 남은 것은 강력한 리더 뿐”이라고 했다.

이탈리아의 극우화는 각종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이달 초 로마 정치사회경제연구소(EURISPES)의 조사 결과 이탈리아 국민의 15.6%가 2차대전 당시 인종청소(홀로코스터)를 부정한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도 나왔다. 2004년 같은 조사(2.7%) 때보다 6배나 급증한 수치다. 심지어 이탈리아 국민의 19.8%는 파시즘 창시자인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 시민 에르시오(70)는 “살비니는 인종차별주의자에 파시스트 독재자”라며 “세상이 마치 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후퇴한 것 같다”고 했다.

로마(이탈리아)=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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